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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원과 동작구

서울현충원의 현충문과 현충탑(2021.05.28)

by 도화유수 2021. 5. 29.

현충문
현충탑
현충문과 현충탑

 

5월의 장마일까 연일 내리는 비가 지겹다. 5월 28일(목) 오후 마침 하늘이 푸르다. 운동도 할 겸 국립현충원을 찾는다.
오늘은 현충문과 현충탑이 중심이 되도록 일정을 잡는다. 집을 나설 때 화단에 내어둔 군자란꽃이 눈길을 끈다. 늘 가는 길에서 조금 더 걷기를 더하려고 사당통문에서 동작통문까지 외벽을 따라 걷다가 동작통문으로 현충원에 입장한다.

동작통문

 

 

현충일을 앞두고 국립현충원을 깨끗이 단장을 했다. 벌초하고 새꽃으로 단장하고 태극기도 꽃혀있다.

학도의용군무명용사탑

국립서울현충원 현충문 좌측으로 하나의 위령탑이 자리하고 있다. 바로 학도의용군 무명용사 위령탑이다.

이 탑은 1954년 10월 30일 지금의 현충탑 자리에 “무명용사비”란 이름으로 건립되었으며, 1956년 1월16일 대표 무명용사 1위를 뒤쪽에 있는 반구형 봉안함에 안장하면서 '무명용사탑'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후 1967년 9월 현충탑 뒤편 위패봉안관 지하 무명용사 봉안실이 건립되자 대표 무명용사 1위와 묘역에 안장되어 있던 무명용사 총 5,757위를 지하 무명용사 봉안실로 옮기고 무명용사탑을 현재의 위치로 이설하였다. 그러고나서 1번 묘역에 안장되어 있던 학도의용군 48위를 탑 뒤에 있는 반구형 봉안함에 안장하면서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으로 다시 고쳐 부르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약 5만명으로 추산되는 학생들이 구국전선에 뛰어들어 포항 지역을 비롯한 각 지구 전투에서 용감히 싸우다가 7,000여 명이 전사하였다. 그러나 그들 시신이나 무덤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당시 포항전투에서 중대급(48명) 규모의 학도의용군이 북한군 전초 부대를 맞아 분투하다가 전몰, 포항여자중·고등학교 부근에 가매장되어 있었다. 이들을 1963년 9월 24일 국무회의에서 국군묘지에 안장할 것을 의결함에 따라 1964년 4월 25일 '대한학도의용군 동지회' 주관 아래 국군묘지 1번 묘역에 안장하였다가 1968년 4월 현재의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에 이장하게 되었다. 3개의 아치 문형으로 구성된 이 탑은 중앙의큰 문형 안에 무명용사탑이 세워져 있고, 탑 뒤쪽 중앙에는 사각의 화강함 석함으로 된 반구형의 분묘가 설치되어 있다. 이 탑의 높이는 3.6m, 폭은 8m, 중앙 문형의 높이는 5.5m, 좌우 문형의 높이는 3m, 화강석 바닥면적은 165㎡이다. 석재는 오석, 표면은 황등석이다. 아치 문형은 화강석이다.

탑의 전면에는'무명용사영현', 후면에는 '이곳에 겨레의 영광인 한국의 무명용사가 잠드시다 단기 4288년 7월 15일 대한민국'이 각각 새겨져 있다. 단의 앞쪽 제단 전면에는 '학도의용군의 묘'라고 가로로 새겨져 있다.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 입구 양쪽에는 해태상이 있다. 이 해태상은 대한민국 광복 1년 만인 1946년 8월 15일 대전역 광장에 '을유팔월십오일 기령 해방기념비'와 함께 세워졌다가 1957년 대전에서 국립서울현충원에 기증해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 입구에 세워진 것이다. 기증 당시의 이유나 시기 등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현재 대전 보문산에 있는 '을유 팔월 십오일 기령 해방기념비' 의 옆면에 '1957년 5월 해치(태)석 한 쌍 동작동 국립묘지에 기증'이라고 기록되 있고, 1958년 3월 현충원이 전국 각 시·도에서 상징물 등을 받아 '시/도 공원'을 완공했다는 점과 현재 무명용사탑의 자리가 과거 시/도 공원 터였다는 점 등은 이 해태상이 대전역에 서있던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국립서울현충원에서>

 

 

현충문

현충문은 국립서울현충원을 상징하는 현충탑의 출입문으로 1968년 10월 1일 착공하여 1969년 4월 30일 준공하였다. 건축양식은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사당전및 극락전을 본뜬 순 한국식이다. 그러나 목재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콘크리트로만 축조하였다.

이 문의 좌측에는 현충탑 참배시 귀빈들이 대기할 수 있는 귀빈실이 있고, 우측에는 직원이 상주하여 현충탑 참배 안내 및 각종 방송을 실시하는 안내실이 있다. 그 동안 귀빈실과 안내실이 협소하여 국빈 방문시 참배행사가 불편했던 것을 2010년 약 5개월에 걸쳐 개보수 공사로 전체 면적 375.15㎡, 귀빈실 86.94㎡, 안내실 75.6㎡의 넓은 공간을 확보함에 따라 국격에 걸맞은 경건하고 엄숙한 참배 행사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현충문 입구 양쪽에는 두 마리의 호랑이상이 건립되어 있다. 이 호상(虎像)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바친 호국영령들을 두 마리의 호랑이가 지켜줄 것을 기원하는 뜻으로 건립한 것이다. 화강석 좌대(높이 143 ㎝) 위에 웅크리고 앉은 형태를 취하고 있는 이 호상은 높이 125㎝, 폭 110㎝, 길이 230㎝이다.

현충탑

현충탑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추모하는 상징적인 탑으로 1년여의 공사 끝에 높이 31m 규모로 1967년 9월 30일 준공되었다. 화강암 돌붙임 공법이 사용되었으며, 위에서 내려다보면 십자형으로 되어 있다 이는 영현들을 동·서·남·북 4방향에서 수호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현충탑 앞에는 오석 평판으로 된 제단과 향로, 향합대가 자리하고 있다. 제단 뒤쪽에는 이은상 선생이 짓고 박정희 대통령이 휘호한 현충시가 새겨져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향로는 중간이 막혀 있다. 윗부분은 향을 피울 수 있고 아래 부분에는 6·25전사자 및 파월장병의 인식표를 넣었다. 향로 위 원형 테두리에는 국방부와 육·해·공군 및 해병대를 상징하는 마크가 조각되어 있다. 향로는 높이 80cm, 직경 80cm, 무게 300kg이다. 건군 2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국방부가 제작하였으며, 1968년 10월 1일 국방부 장관이 각 군 참모총장 및 고위 장성들을 대동하여 봉납하였다.

향로 오른쪽에 놓인 향합대는 오석으로 만들어졌다. 전면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휘호한 '충혼'이란 글자, 양 옆에는 무궁화 문양의 조각이 각각 새겨져 있다.

탑의 좌우에는 화강암 석벽이 펼쳐져 있다. 좌측 석벽 끝에는 5인의 애국투사상, 우측 석벽 끝에는 5인의 호국영우상이 각각 동상으로 세워져 있다. 현충탑 좌우의 석벽은 제사를 지낼 때 제상 뒤편에 쳐 놓는 병풍을 상징한다. 높이는 2.4m, 길이는 좌우 각각 23m다.

우측 석벽 면에는 6·25전쟁, 4·19의거, 조국건설, 영광, 애도 등을 상징하는 조각이 정교하게 부각되어 있다. 좌측 석벽에는 항일운동, 8·15광복을 상징하는 조각이 역시 정교하게 부각되어 있다. 석벽에 표현돼 있는 이들 조각은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들의 고귀한 위훈을 기리고 있다.

현충탑 좌측 석벽 끝에 세워져 있는 애국투사 5인상은 국권 회복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모두 바친 순국선열들을 상징하고, 우측 석벽 끝의 호국영웅 5인상은 국토방위와 자유 수호를 위하여 용맹을 떨치신 육·해·공군과 해병대, 경찰 등의 용사들을 상징하고 있다. 높이는 모두 5.5m이다. 현충탑과 석벽의 벽면 부각, 동상 및 향로는 홍익대 최기원 교수가 설계·제작하였다.

현충탑 아래 내부는 위패봉안관이 자리잡고 있으며, 중앙에 있는 영현승천상 아래 지하에는 봉안실이 설치되어 있다.

2010년 3월부터 5월 사이에 현충탑과 부조벽 등을 세척하고 새롭게 코팅하여 단장하였다. 또 일반인 및 장애인의 출입 편의를 위하여 제단 앞면의 경사로를 우측에서 좌측으로 이설하고, 노후된 계단석판석을 통석으로 겨체하는 개보수 공사를 실시하였다.

육탄10용사현충비

장병 묘역의 6번 묘역 제일 앞줄에 안장되어 있는 육탄10용사의 넋을 기리고자 건립된 추모비이다. 6·25전쟁 당시 사단장인 김석원 장군이 앞장서고 개성 출신 독지가와 일반 유지들이 '육탄 10용사 현충비 건립위원회'를 조직한 후 국방부의 지원을 얻어 건립한 비이다. 1955년 3월 중순부터 기초공사에 들어가 4월 중순에 준공하였으며, 5월 4일 전몰 일자에 맞추어 제막식을 가졌다.

이 비는 최초 배롱길 위(솔내길 끝)에 세워졌으나 '육탄10용사 기념사업회'의 이전 건의를 받아들여 약 1개월간의 공사를 거쳐 2013년 9월 5일 육탄10용사가 잠들어 있는 6번 묘역 앞으로 이전하였다.

비의 높이는 6m, 폭은 상단 0.5m, 하단 2.3m, 바닥면적 89.8㎡이다. 하단의 기단석 위에 5층의 탑을 쌓은 듯한 형상으로 하여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좁아진다. 제일 하단에는 비문, 그 위에는 ‘THE TEN BRAVE WARRIORS’라는 영문표기, 그 위에는 10용사의 계급과 성명 그리고 제일 상단에는 육탄 10용사 현충비라는 비명이 각각 새겨져 있다.

비의 전면 중앙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해방 이후 三八선으로 말미암아 국토가 분단되어 오던중 단기 四二八二년에 이르러서는 개성 서북방 송악고지에 공산 괴뢰군이 불법침입하여 방위가 불리하고 개성이 위태로우매 동년 五월 四일 제一사단 제十一련대 소속 서부덕 소위 이하 九명의 용사 화랑정신을 받아 조국애와 민족정기에 불타는 정열로 몸에 포탄을 지니고 적의 지하 참호 속에 뛰어들어 육탄 혈전, 적진을 분쇄하고 옥으로 부서지니 멸공전사상에 이룬 공과 그용맹이 널리 세계에 펴지다. 광음이 흘러도 잊음없이 명복을 빌고 그 영령을 추모하고저, 이에 눈물과 정성으로 현충비가 서나니 이는 조국수호의 정신을 청사에 새기고 만대에 전함이라 十용사의 영혼 불멸하여 겨레와 함께 살며 길이 빛나리로다.

 

현충일을 앞두고 잘 단장된 국립현충원의 비개통문으로 나와 집으로 돌아오니 15,000보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