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현충원의 장병묘역 이팝숲길을 걸어서 50번 묘역에 도달한다.
50번묘역에는 호국형제의 묘(육군 강영만 하사(형)와 강영안 이등상사(동생)의 묘)이다. 6.25전쟁 중 전사한 동생이 먼저 안장되었고 형의 유해가 2014년 발굴되어 50번 묘역에 나란히 안장되었다고 한다. 이날 열심히 50번 묘역을 다녔으나 찾지 못했다. 다음에 다시 한번 찾아볼 예정이다.
51번 묘역 강재구 소령과 이인호 소령이 묻힌 묘역이다.
강재구 소령 (1937. 7. 20 ~ 1965. 10. 4)
강재구 소령은 호국간성의 도시인 인천(仁川)에서 태어나
인천 창영초등학교를 거쳐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60년 육군사관학교 제16기로 졸업하고 육군소위로 임관되어,
수도사단(맹호부대) 제1연대 소대장, 제1군 부사관학교 교관을 역임하였다.
1965년 한국군 1개 사단의 월남파병이 결정되자, 자원하여
맹호부대 제1연대 제10중대장이 되었다. 그 해 중대전투훈련에서
수류탄 실탄 투척훈련 중 한 병사의 실수로 수류탄 한발이
중대원들이 모인 곳에 떨어졌다. 위기를 직감한 강재구 중대장이
“빨리 피하라”라는 외침과 함께 자신의 몸을 날려 수류탄을
덮쳐서 많은 부하들을 구하고 자신은 28세의 나이로 장렬히 산화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애국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소령으로 1계급 특진시키고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강재구 소령의 숭고한 정신을 살리기 위해서
맹호 제1연대 제3대대를 ‘재구대대’라 명명하여
파월 당시 재구부대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현재 까지도
최전방에서 국토방위에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철통같은 정신으로 임하고 있다.
<출처 :국가보훈처>
이인호(李仁浩, 1931 ~ 1966)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고수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경상북도 경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경상북도 대구에서 성장하였다. 경상북도 대구 대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 11기로 진학하여 1957년 졸업하였다. 해병대 소위로 임관되어 여러 부대를 거쳐 해병대 대위로 진급하였으며, 해병대 1사단 수색중대장으로 근무하다가 베트남 전쟁에 청룡부대 3대대 5중대장으로 파병되었다. 청룡부대 3대대 정보참모로 투이호아 지역에서 해풍작전시 동굴탐색중 베트콩이 중대원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자, 홀로 몸으로 덮쳐 전사하였고 사후 해병 소령으로 특진되어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1966년 11월 당시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으로부터 직접 은성 훈장이 추서되었다
1967년 3월 22일 경상남도 진해시 경화동 1105번지 해군 교육사령부 부지 안에 해병 소령 故 이인호 선생 추모 동상이 세워져 있고 2005년 10월 9일 모교인 경상북도 대구 대륜고등학교에도 추모 동상이 세워져 있다.
황규만( ) 장군 과 이름없는 묘(육군 소위 김○○의 묘 / 54번 묘역)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장병의 묘 가운데 특이하게도 이름이 없는 묘비가 하나 있다. 이 묘비의 주인공은 故 육군 소위 김수영이다.
이 묘는 6·25전쟁 초기에 낙동강 방어선 경북 안강지구 도음산 전투에서 함께 전투를 수행하던 황규만 소위(예비역 윤군 준장)가 치열한 전투 중에 전사한 김 소위의 시신을 가매장 하였다가 세월이 지나 수습한 후 육군참모총장에게 청원하여 승인을 받아 국립서울현충원 54묘역에 안장한 것이다.
6·25전쟁이 끝나고 세월이 흐른 뒤 1군사령부 비서실장으로 보임한 황규만 대령은 평소 잊지 않고 있던 김 소위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가매장 지역을 헤맨 끝에 시신을 발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oo 소위라고 알 뿐 정확한 성명을 알 수 없어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할 수 없게 되자 육군 참모총장께 청원하여 1964년 5월 29일 국립서울현충원 54모역 6판 1659호에 안장하였다.
1976년에 예편한 황규만 장군(예비역 준장)은 직장생활 속에서도 김 소위의 신원 확인을 위해 노력한 끝에 1990년 가족과 연락이 되어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육군 소위 김수영 金壽泳)
국립서울현충원은 김 소위의 신원이 확인되었으나 전쟁의 아픔과 황규만(黃圭萬) 장군의 전우애를 후대에 길이 계승하는 역사의 산물로 남겨 두기 위해 이름 없는 이 묘비는 그대로 두고 추모비에만 이름을 새겨 두었다. 김소위의 묘소에는 이름을 채워지기는 커녕 아직도 텅비어있다.
비석에 두글자 이름을 새기는 것이 30여년이 넘을 정도로 어려운 일인가?
무려 전후 40년동안 묘비에 빈칸으로 놔두고 이름을 찾아주려 동분 서주했던 황장군의 노력이 있었고 이들의 이야기를,전쟁의 아픔을 역사에 남기기위해 국방부가 유가족의 동의를 얻어 묘비를 그대로 두고 묘비앞 추모비에 김소위의 이름과 사연을 새겼다.
황장군의 마지막 바람은 김소위곁에 묻히겠다는 것이다. 김소위를 놔두고 나혼자 딴곳에 묻힐수 없으며 황장군은 자신의 사후 김소위곁에 묻히려 국방부에 청원을 넣고 보훈처의 허락을 받는등 미리미리 준비를 마쳤단다.
70년전의 전우와의 약속을 잊지않고 지키는 참군인이기에 아들이 흘리는 눈물의 남다른 의미를 이제는 알것 같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혼탁해서인지 70년전 전우와의 약속을 죽을때까지 지키는 황장군같은 참다운 군인, 참다운 어른이 유독 많이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국립현충원에서 사당통문으로 돌아오는길에 일군의 날벌레 무리를 본다. 오른편으로 가면서 날아올라 비행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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