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맡은 바 책무로 바쁘고 힘들지만 오후에 시간을 내어 국립묘지를 걷는다. 오늘은 국립묘지의 옛 주인인 창민 안씨의 묘소와 호국지장사를 둘러보려고 마음을 머고 출발한다.
사당통문의 부근 사당종합체육관이 동작구 코로나 예방접종센터로 활용되고 있다. 남성역에서 사틀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금낭화 군락지를 지난다.
벌써 현충원이 녹색으로 바뀌었다.
창빈안씨 묘역에 도착한다.
창빈안씨[ 昌嬪安氏 ]
창빈안씨(昌嬪安氏, 1499년∼1549)의 본관은 안산(安山)이다. 1507년(중종 2) 궁녀로 입궐하였다가, 후에 중종의 후궁이 되었다. 차남 덕흥군(德興君)의 3자 하성군(河城君)이 조선 14대 왕 선조(宣祖)이다.
생애
아버지는 안탄대(安坦大)이며, 어머니는 황씨(黃氏)이다. 아버지 안탄대는 중종반정의 원종공신으로 적순부위(迪順副尉)의 관직을 받았고, 후에 의정부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도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1507년(중종 2) 궁녀로 입궐하였고, 1518년(중종 13) 후궁이 되었다. 1521년(중종 16) 장남 영양군(永陽君) 이거(李岠)를 낳았고, 차남 이이수(李頤壽)는 일찍 사망하였다. 1526년(중종 21) 정신옹주(靜愼翁主)를 낳았으며, 1530년(중종 25) 3남 덕흥군 이초(李岹)를 낳았다. 1549년(명종 4) 사제(私第)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51세였다.
활동사항
9세에 궁녀로 입궁하여 대비전(大妃殿)에서 중종의 어머니인 왕대비 정현왕후(貞顯王后)를 모셨다. 이때 정현왕후에게 품성을 인정받아 중종의 승은(承恩)을 입었다. 20세였던 1518년(중종 13) 후궁이 되었고, 22세가 된 1520년(중종 15) 상궁(尙宮)이 되었다.
영양군과 정신옹주를 낳은 후 31세였던 1529년(중종 24)에 내명부 종4품 숙원(淑媛)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해 3월 왕비였던 문정왕후가 내·외명부를 거느리고 창덕궁에서 친잠례(親蠶禮)를 할 때 함께 의식에 참석하였다. 이듬해 1530년(중종 25) 32세의 나이로 덕흥군을 낳았는데, 그가 선조의 아버지이다. 1543년(중종 35)에 종3품 숙용(淑容)이 되었고, 이후 정3품 소용(昭容)의 지위에 올랐다. 1544년(중종 39) 중종이 승하하고 3년 상을 치른 후에 궁궐에서 물러나려고 하였으나,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배려로 계속 궁궐에서 살았다.
창빈안씨는 성품이 단정하고 온화하여 왕대비·왕비의 인정과 신뢰를 받았다. 특히 창빈안씨가 사망한 후에 문정왕후가 그녀의 자녀들을 돌보아주었을 정도로 그들의 사이는 돈독하였다.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은 덕흥군의 아들들과도 관계가 돈독하여 이것이 훗날 하성군이 즉위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상훈과 추모
1549년(명종 4) 사망한 이후, 그녀는 소용의 지위에서 1577년(선조 10)에 정1품 창빈(昌嬪)으로 추봉되었다. 장남 영양군에게 후손이 없자, 창빈안씨의 신주를 덕흥대원군의 사당으로 옮기도록 하였고, 하원군(河原君) 이정(李鋥)에게 봉사(奉祀) 하도록 하였다. 1681년(숙종 7) 낭원군(朗原君) 이간(李偘)의 상소로 창빈의 묘도(墓道)에 비석을 세웠다.
묘소는 원래 경기도 양주군 장흥리에 있었으나, 장소가 좋지 않다고 하여 과천의 동작리(현재 서울특별시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하였다. 국립묘지 내에 있는 창빈안씨 묘소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4호로 지정되었다. 1683년(숙종 9)에 신정(申晸)이 짓고, 이정영(李正英)이 글씨를 쓴 ‘창빈안씨 신도비(昌嬪安氏神道碑)’가 함께 있다.
https://news.v.daum.net/v/20210416050138419?x_trkm=t
박정희 대통령묘소와 장군묘역사이의 지점에 핀 꽃아 너무나 이색적이다.
호국 지장사 입구이다.
국립현충원 호국지장사
국립서울현충원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와 국가유공자 등 호국영령들을 모신 국립묘지다. 국가원수묘역, 애국지사묘역, 국가유공자묘역, 군인·군무원묘역, 경찰관묘역, 외국인묘역 등 6개 묘역에 17만여 위(位)의 영혼이 잠들어 있다.
호국지장사는 1950년대 정부가 현충원을 조성할 수 있도록 대규모 사찰 토지까지 내놓았으며 매일 조석예불을 통해 호국영령들의 극락왕생을 기도하는 호국도량이다. 아울러 서울 도심 사찰임에도 고즈넉함을 갖춘 영험 있는 기도처인데다가 유명한 약수터까지 있어 발길이 끊이지 않는 시민들의 휴식처이기도 하다.
호국지장사는 신라시대 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갈궁사(葛弓寺)에서 기원한 천년고찰이다. 도선국사가 북쪽으로 만행을 하다 한강 언덕에 이르러 둘러보니 상서러운 기운이 퍼져 나오는 곳이 있어 가보니 칡넝쿨이 엉켜 있고 약물이 샘솟는 명당이 있어 토굴을 짓고 갈궁사라고 칭했다고 전해져 온다. 이후 폐허가 되다시피한 갈궁사를 고려 공민왕 때 보인스님이 화장암(華藏庵)으로 중창했다.
조선 선조는 친할머니인 창빈 안씨의 묘를 사찰 인근으로 모시며 이 사찰을 중창해 화장사로 이름을 바꾸고 조포사찰(造泡寺刹)로 지정해 해마다 포백(布帛)을 내렸다. 한국전쟁 직후 사찰 땅 36만평(119만㎡)을 현충원 부지로 내어줌으로써 43만평 규모의 국립묘지(현 국립서울현충원)가 조성되는데 일조했다. 현충원 내 유일한 종교시설인 화장사는 1983년 당시 주지 혜성스님(현 청담문도회 문장)이 지장보살의 원력으로 호국영령의 극락을 기원한다는 의미에서 ‘호국지장사’로 이름을 바꿨다.
호국지장사는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봉황포란형(鳳凰抱卵型) 형상 가운데 봉황의 입부분에 위치해 있어 명당 중의 명당으로 손꼽혀 예부터 영험있는 기도처로 명성이 나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호국지장사에 들렀다가 “만일 이곳에 절이 없었다면 내가 묻히고 싶은 땅”이라고 할 만큼 좋은 곳으로 손꼽힌다.
이와 함께 조선 중기 재상으로 이름 높았던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이 소년시절 머물면서 공부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예부터 호국지장사에서 기도하거나 공부를 해서 과거에 급제하거나 각종 고시에 합격했다는 일화가 적지 않게 전해지고 있다. 1960년대에는 해마다 2~3명씩 사법시험 합격자를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고시생 합격 수기집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에도 호국지장사에서 공부한 뒤 사법시험에 합격한 한 은행원의 일화가 담겨져 있을 정도다.
대규모 사찰 부지를 내놓으면서 현충원이 조성된 만큼 호국지장사와 현충원의 관계는 밀접할 수밖에 없다. 호국지장사는 지난 2014년 5월 서울현충원과 자매결연을 맺은 뒤 연 2회 6·25 참전용사 무연고 묘역에서 묘비를 닦고 조화를 교체하는 등 자원봉사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부터는 제일 많은 인파가 찾는 현충일 날마다 국수만발공양을 통해 정성 가득한 국수를 무료로 대접하고 있다. 또한 유해발굴감식단 등 현충원 내 군장병들에게 떡과 과일 등을 공양하며 격려하고 있다.
호국지장사는 불자가 아니라도 단골손님이 가게를 자주 찾아가듯 매일같이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 사찰 약수터인 약왕천(藥王泉) 덕분이다. 약물이 샘솟는 명당 자리에 위치해 있어 현충원을 참배하거나 현충원 둘레길을 걷다가 목을 축이기 위해 약왕천을 찾는 것이다. 특히 여러 개의 큰 물통을 들고 약수터를 찾는 이들이 많아 이른 아침시간대는 물론 오후시간에도 줄을 서서 물을 받아갈 만큼 인기가 높다. 약왕천에는 약사여래불도 모셔 놓고 있어, 약수를 이용하는 시민들이 부처님 도량과 자연스레 익숙해질 수 있도록 했다.
호국지장사는 천년고찰인 만큼 능인보전 내 철조약사여래좌상과 대웅전 내 아미타회상도 등 14점의 서울시 유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대웅전 아미타불상의 복장유물로 나온 조선시대 상궁의 ‘당의(唐衣)’는 색감이 살아 있어 궁중복식연구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 국가지정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 문화재는 아니지만 지장보살입상을 중심으로 뒤로는 2500여 기의 지장보살상이 모셔져 있어 호국지장사를 찾는 이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약수터인 약왕천, 호국지장사는 불자들의 신심 증장을 위해 보름법회를 자자포살법회로 운영하고 있다. 스님과 신도들이 매달 음력 보름마다 자자포살법회를 통해 자신의 허물을 살피고 참회하며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끔 하기 위해서다. 도호스님은 직접 쓴 서예 작품을 인연 닿는 신도들에게 나눠 주고 있다.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선을 받들어 행하며 자기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 부처님들의 가르침이라는 ‘칠불통게(七佛通偈)’의 글귀를 주로 선물한다. 뒷면에는 글귀의 뜻을 함께 적어줌으로써 신도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늘 되새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호국지장사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들렀다가 절이 아니면 자신이 묻히고 싶어 했다는 사연이 전해 내려온다.
돌아오는 길 우리아파트에 핀 목단. 색깔이 이런 것에 놀라서 사진에 담았다. 아래 조금의 자색이 나는 것이 일반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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