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향한다. 집을 나와 현충원 뒷편인 사당동 정금마을쪽 동작충효길을 걷다가 현충원 동작통문을 통해 들어오면 유격부대 전적 위령비가 나온다. 지금 그곳에는 겹벗꽃이 활짝 피어있다.
오늘은 유공자2, 3묘역과 임시정부요인묘역을 둘러볼 예정이다.
유격부대 전적위령비에서 순환도로를 따라 100m쯤가면 울타리에 금낭화가 이 시기에 군락을 이룬다.
무후선열제단 (無後先烈祭壇)
애국지사 묘역 위쪽에는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하였으나,후손이 없거나 유해마저 찾을 길이 없는 131위 순국선열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이 제단에는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3·1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한 유관순 열사, 고종황제의 친서를 가지고 헤이그만국 평화회의에 참석했던 이상설, 이준(서울 수유리 안장), 이위종 열사, 만주지역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홍범도 장군과 정의부 총사령 오동진 장군을 비롯해 정인보, 엄항섭, 조소앙 등 납북 독립유공자 들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다.
이 제단은 1975년 8월 15일 광복 3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후손 없는 선열의 제단 건립위원회(대표 이은상)’에서 묘소도 없고 후손도 끊어진 선열의 위패를 안치하고자 국고보조를 받아서 건립하였다.
건물은 철근 콘크리트 슬래브조 단층으로 가로 19.6m, 세로 4m, 높이 4.5m, 내부면적 85.14㎡이다. 위패는 3층 계단에 모셔져 있으며 중앙에는 선열을 추모하기 위한 제단과 향로가 설치되어 있고 후면 벽에는 피리를 불면서 승천하는 선녀상이 입체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묘소도 없고 자손도 없이 외로운 혼으로 도는 이들 돌보아 드린 이 하나 없고 기억마저 사라져 가므로 존함이나마 정성껏 새겨 따로 이곳에 모시옵나니 선열들이여 국민 모두가 후손이외다 우리들 제사 받으옵소서”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 새겨진 헌시비의 일부 내용
김동삼[ 金東三 ]
개설] 본관은 의성(義城), 본명은 긍식(肯植), 자는 한경(漢卿)이었는데, 만주로 망명해서는 이름을 동삼(東三), 자는 성지(省之), 호는 일송(一松)으로 고쳤다. 1878년(고종 15)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서 김계락(金繼洛)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에는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문하인 김주병(金周秉)에게서 전통 교육을 받았다.
활동사항
김동삼은 서간도 독립군 기지 개척의 선구자였으며, 만주 독립군의 통합에 노력했던 독립운동가이다. 한국 근대 질곡의 긴 역사 속에서 독립을 향한 김동삼의 본격적인 행보는 1907년부터 시작되었다. 김동삼은 1907년 3월 류인식(柳寅植)·김후병(金厚秉)·하중환(河中煥) 등과 함께 안동에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고 교감으로 활동하였다.
협동학교에 재직하면서 그는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와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해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1911년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에 도착한 김동삼은 신흥강습소를 설립하고 경학사 사장 이상룡(李相龍)을 도와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힘을 쏟았다.
1913년 3월부터 이름을 중국 동삼성(東三省)의 호칭을 따서 ‘동삼(東三)’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1914년에는 신흥학교 1~4회 졸업생들과 그 분교, 노동야학 졸업생 385명을 인솔하여 통화현 팔리초 깊은 산 속에 백서농장(白西農庄)을 건립하고, 그 장주(庄主)가 되었다. 이는 김동삼이 만주 독립군의 거장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시점이다.
1919년 국내 3·1운동의 영향으로 길림에서도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는데, 이때 김동삼은 민족 대표 39인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3·1운동의 영향으로 서간도 한인 사회도 이에 호응하여 같은 해 4월 경학사의 후신이었던 부민단을 전 서간도 지역으로 확대하여 한족회를 설립하고, ‘군정부’라는 독립군 조직을 편성하였다. 이때 김동삼은 한족회의 서무사장(庶務司長)을 맡았다가, 11월 ‘군정부’가 서로군정서로 개편되면서 참모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1922년 6월 경신참변으로 붕괴되어 버린 동포 사회와 독립군을 통합하기 위해 남만통일회를 주도하여, 통군부(統軍府)를 탄생시켰다. 8월 30일 전만한족통일회가 결성되고, 통군부가 통의부(統義府)로 확대 개편되자, 교육부장이었던 김동삼은 통의부 총장을 맡게 되었다.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위해 1923년 1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열리자 김동삼은 서로군정서와 남만주의 한인 대표로 참석하여 의장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당시 국민대표회의가 임시정부의 개조론·창조론으로 대립할 때 그는 개조론에 가세하였으나, 그 회의는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1923년 가을 만주로 돌아온 김동삼은 이후 독립군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하여 독립군 단체에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을 수습하는 회의장에서 의장으로서 역할을 수행했으며, 남만통일회·국민대표회의·전만통일회·민족유일당운동촉성회 등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에 주력하였다. 1924년에는 10개 단체 대표를 모아 전만통일회의주비회(全滿統一會議籌備會)를 개최하고 의장으로 활약하였다.
1924년 11월 24일 김동삼은 정의부(正義府)를 탄생시키는 주역으로 활약하였으며, 중앙행정위원 겸 외무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1927년 4월 15일 길림 남쪽 영길현 신안둔에서 유일당촉성회의가 열리자, 김동삼은 정의부 중앙위원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1928년 5월에는 정의부를 대표하여 삼부통합회의를 열어 분열된 독립운동 세력의 대통합을 모색했으나 실패하였다. 1928년 7월 삼부통일회의가 결렬되기 앞서 김동삼은 정의부를 이탈하였으며, 이탈 세력을 규합하여 혁신의회를 조직하고 의장이 되었다.
1929년 좌우 합작을 도모하기 위해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가 조직되었고, 김동삼은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어 민족유일당 결성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1929년 4월 같은 지역에 국민부가 출범됨으로써 민족유일당 계획은 무산되고, 1929년 5월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도 해체되었다. 이어서 1930년 7월 한국독립당이 조직되자 김동삼은 고문을 맡았다.
지속적으로 독립운동 단체 통합에 힘쓰던 김동삼은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북만주로 가서 활동을 모색하던 중 하얼빈에서 일제 밀정의 밀고로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는 평양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37년 4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시신은 평소에 그를 존경하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거두어 장례를 지냈는데, 유언대로 화장하여 한강에 유해를 뿌렸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안동댐 보조광장에 일송 김동삼 어록비가 세워져 있다. 1999년 11월 4일 안동청년유도회가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김동삼 [金東三]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비개통문을 통래 현충원을 나온다.
돌아오는 길 까치산 언덕에 복사꽃이 지고있다. 땅위의 꽃이 더 아름답다. 이렇게 또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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