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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활동

중국고대 문인들의 삶과 글 3: 북송의 문인들(2021.06.09)

by 도화유수 2021. 6. 13.

소동파의 적벽부

 

구양수[歐陽修](1007~ 1072)

중국 북송의 정치가이자 문인이다. 자는 영숙(永叔), 호는 처음에는 취옹(醉翁), 후에 유일거사, 시호는 문공(文公)으로 노릉(盧陰, 장시성) 출신이다, 4세 때 아버지를 잃고 가난한 중에서도 어머니의 교육을 받아 1027년에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 인정조(1022~1063)에 중용되었으나 강직한 성격으로 좌천되어 지방관을 역임했다. 후에 중앙에 돌아와 한림원 학사가 되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으나 왕안석의 혁신 정치에 반대하여 퇴관하였다(1071). 문하에서 증공(曾鞏)과 소식(蘇軾=소동파 蘇東坡), 소철(蘇轍) 등 유능한 인재가 나왔다. 그의 서예는 이읍을 배웠다 하며 금석학의 선구를 이룬 『집고록발미(集古錄跋尾)』외에 서론에는 『필설(筆說)』, 『시필(試筆)』이 알려져 있다

송나라 왕안석과 사마광

송나라 문장가 당송 8대가이며 정치가인 왕안석은 1021-1086년 65세 사망

신법으로 개혁을 추진햇으나 보수파의 매도로 실패한다

신법은

1) 균수법 - 중간상의 폭리를 차단한다. 지방에서 오는 공물 운송을 관청인 발운사가 운용하는 무상 운송 제도로 제품의 신선도를 유지한다

2) 청묘법 - 농민들에게 낮은 이자로 농자금을 대출해 준다. 재원은 상평창에서 마련한다

3) 보갑법 - 10집을 1보로 한다. 장병 징집과 치안 임무를 맡는다

4) 시역법 - 중소 상인에게 자본을 대여한다

5) 보마법 - 백성들에게 말을 기르게하고 전쟁때 군마로 활용한다

6) 모역법 - 지방 행정 보조 민간인 비용이 급증하자 이를 개선해 모든 농가가 재산별로 면역전을 내게 하고 역이 면제된 관리에게도 조역전을 징수한다. 그 돈으로 실업자에게 품삯을 지불하고 형평을 시도한다

1038년 17세 이원호의 대하 (서하)가 침입해 7년 전쟁을 한다. 송나라 조광윤은 문치 정책을 펴 군사력이 약화되 대하와 화친을 맺는다. 송나라 인종때 범중엄이 군사력 강화를 노력하나 송은 군사력이 부족하다.

서하가 송에게 신하의 예를 하고 송은 비단 13만필, 은 5만냥, 차 2만근등 조공을 보내기로 한다. 송은 군사 수가 급증하나 질이 나쁘고 매년 국가 예산의 80%를 국방비로 지불한다. 황실은 낭비하고 국고는 탕진된다. 과거를 3년마다 실시해 관료수가 급증하고 대지주가 증가한다. 농민은 소작농으로 전락해 재정 수입세수는 감소한다. 노비와 빈민이 증가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왕안석의 개혁은 서민 농민 중소 상인을 도운 것인데 대상인 대지주등 기득권에게는 치명적이 된다

1042년 21세 진사가 되어 20년간 화남에서 지방관으로 근무한다

1069년 48세 19세의 젊은 황제 신종이 즉위하고 한림학사 왕안석이 부재상 참지정사로 임명된다. 이후 5년간 개혁을 실시한다. 강남 출신 신진 관료들을 대거 등용한다

개혁의 원칙은

1) 부국강병 2) 중앙집권 강화 3) 대지주 대상인의 횡포를 막고 중소 농민과 싱인을 보호 4) 국가 세수를 늘리고 관료제를 정비

신법파는 사마광, 한기등의 구법파와 대항한다.

1074년 53세 허베이에 큰 가뭄이 들고 황태후, 내시, 관료등 구법파의 반격이 시행된다.하늘의 분노라며 상소를 올려 신종이 왕안석을 지방으로 좌천시킨다

1076년 55세 사직하고 은거한다

1085년 64세 북송 신종이 사망하고

1086년 65세 왕안석이 사망한다. 사마광이 재상이 되어 신법을 폐지한다. 당쟁이 격화되 정국은 혼란에 빠지고 송나라 국력이 약화된다

 

송나라 정치가 사마광은 1019-1086년 67세 사망. 구법파의 영수로 자치통감의 저자다

1067년 48세 신종 즉위후 왕안석의 신법에 한림학사 사마광이 반대한다

신종에게 퇴출되 낙양에서 은거한다. 선대 영종과 신종 모두가 사마광을 신뢰한다

1085년 66세 10살 철종이 즉위하자 섭정 선인태후 고씨의 재상이 된다. 신법을 페지하나 재임 8개월만에 병사한다.

자치통감은 춘추시대부터 송나라 이전의 5대10국 시대까지 역사서이다.

황제의 치세 도구로서 공자의 춘추 (편년체)를 기초로 한 역사서이다. (당시 주류는기년체)

제자 범저우, 사학 연구의 1인자 유서, 한대사의 전문가 유반등이 공동 필자다.

소순[ 蘇洵 ](1009 ~ 1066)

요약] 중국 북송(北宋)시대의 문학자. 날카로운 논법(論法)과 정열적인 필치에 의한 평론이 구양 수(歐陽修)의 인정을 받아 유명해졌다. 정치, 역사, 경서 등에 관한 평론도 많이 썼으며, 아들 소식(蘇軾) ·소철(蘇轍)과 함께 삼소(三蘇)라 불렸다. 주요 저서에는 《시법(諡法)》,《가우집(嘉祐集)》등이 있다.

자 명윤(明允). 호 노천(老泉). 메이산[眉山:지금의 四川省] 출신. 젊은 시절에는 협객(俠客) 노릇을 하다가 27세 때에 분발하여 학문에 정력을 쏟았으나 진사(進士) 시험에 낙방하자 관리가 되기를 단념하고 정치와 역사평론의 저술에 힘썼다.

1056년 날카로운 논법(論法)과 정열적인 필치에 의한 평론이 구양 수(歐陽修)의 인정을 받게 되어 일약 유명하여졌다. 그후 조정에 나가 북송 이래의 예(禮)에 관한 글을 모은 《태상인혁례(太常因革禮)》(100권)를 편찬하였다.

정치 ·역사 ·경서 등에 관한 평론도 많이 썼으며, 아들 소식(蘇軾) ·소철(蘇轍)과 함께 삼소(三蘇)라 불렸고, 함께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로 칭송되었다.

또, 소순을 노소(老蘇), 소식을 대소(大蘇), 소철을 소소(小蘇)라고도 부른다. 그의 문집을 《가우집(嘉祐集)》 또는 《노천선생집(老泉先生集)》이라 하며, 그 밖에도 《시법(諡法)》(4권)의 저작이 있다.

 

소식蘇軾 소동파[ 蘇東坡 ](1037.1.8 ~ 1101.8.24)

요약] 중국 북송 때의 제1의 시인. “독서가 만 권에 달하여도 율(律)은 읽지 않는다” 고 해 초유의 필화사건을 일으켰다. 당시(唐詩)가 서정적인 데 대하여 그의 시는 철학적 요소가 짙었고 새로운 시경(詩境)을 개척하였다. 대표작인 《적벽부(赤壁賦)》는 불후의 명작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중국을 대표하는 탁월한 문장가 중 한사람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며 북송시대 중국 메이산[眉山:지금의 四川省 眉山市]에서 출생(景祐 3년 12월 19일)하였다. 자 자첨(子瞻), 호 동파거사(東坡居士), 애칭(愛稱) 파공(坡公) ·파선(坡仙) 등으로 불린다. 이름은 식(軾)이며 동생으로 소철(蘇轍)이 있었고 동생과 비교하여 대소(大蘇)라고도 불리었다. 부친 소순(蘇洵)은 구양수(歐陽脩), 왕안석(王安石) 등과 교우하며 송나라에서 이름난 문장가였다. 그의 가문은 부유한 지식인 집안으로 명망이 높았다. 소동파는 송나라 최고의 시인이며, 문장에 있어서도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22세 때 송나라의 도읍인 변경(汴京:현재 카이펑,開封)에서 열린 과거시험에서 진사에 급제하였고, 과거시험의 위원장이었던 구양수(歐陽修)에게 인정을 받아 그의 후원으로 문단에 등장하였다. 모친상으로 고향 미산(眉山)에서 3년 시묘살이를 마친 후 변경으로 돌아와 제과(制科)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했으며 동생 소철은 차석으로 급제했다. 봉상부(鳳翔府: 현재 산시성) 참판(簽判)으로 부임하여 첫 관직을 수행했다. 봉상부에서 임기를 마치고 변경으로 돌아와 궁정의 사무를 담당했는데 이때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던 왕안석(王安石)과 정치적 입장의 차이로 대립적 관계가 되었다. 당시 정치적 실세였던 왕안석의 개혁정책인 ‘신법(新法)’이 실시되자 ‘구법당(舊法黨)’에 속했던 소동파는 지방관으로 전출되어 항주(杭州)로 갔다(1071년). 통판(通判)이라는 한직(閑職)을 맡았지만 그 반면 소동파의 문학적 재능을 발현하기에 좋은 기회가 되었다.

항주로 좌천된 이후 4년 동안 많은 시(詩)를 남겼다. 특히 항주의 서호(西湖)는 소동파의 문학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좋은 장소가 되었다. 1074년에는 밀주(密州)의 태수로 부임하였고 1077년에는 서주(徐州)의 태수로 부임하였다. 소동파는 천성이 자유인이었으며 일반 백성들을 살피고 가까이 했다. 그리고 기질적으로도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신법을 싫어하였으며 “독서가 만 권에 달하여도 율(律)은 읽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일이 재앙을 불러 사상 초유의 필화사건을 일으켜 북송의 수도 변경으로 호송되어 어사대(御史臺)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이 때 나이 44세였다. 심한 취조를 받은 뒤에 후베이성[湖北省]의 황주(黃州)로 유배되었으나, 50세가 되던 해 철종(哲宗)이 즉위함과 동시에 구법당이 득세하여 예부상서(禮部尙書) 등의 대관(大官)을 역임하였다.

황태후(皇太后)의 죽음을 계기로 신법당이 다시 세력을 잡자 그는 중국 최남단의 하이난섬[海南島]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7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던 중, 휘종(徽宗)의 즉위와 함께 귀양살이가 풀렸으나 돌아오던 도중 장쑤성[江蘇省]의 상주(常州)에서 사망하였다.(建中靖國 원년 7월 28일) 그는 폭넓은 재능을 발휘하여 시문서화(詩文書畵) 등에 훌륭한 작품을 남겼으며 좌담(座談)을 잘하고 유머를 좋아하여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었으므로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었다. 당시(唐詩)가 서정적인 데 대하여 그의 시는 철학적 요소가 짙었고 새로운 시경(詩境)을 개척하였다. 대표작인 《적벽부(赤壁賦)》는 불후의 명작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소철[ 蘇轍 ](1039 ~ 1112)

요약] 당송팔대가인 중국 북송 때의 문학자. 철종 때 우사간(右司諫), 상서우승(尙書右丞)을 거쳐 문하시랑(門下侍郞)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시문 외에도 많은 고전의 주석서(注釋書)와《난성집(欒城集)》,《난성응소집(欒城應詔集)》,《시전(詩傳)》 등의 저서가 있다.

자 자유(子由). 호 난성(欒城). 메이산현[眉山縣:四川省 남쪽에 있던 현] 출생. 소순(蘇洵)의 아들로 19세 때 형 소식(蘇軾:東坡)과 함께 진사시험에 급제, 정계로 들어갔으나,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여 지방관리로 좌천되었다.

철종(哲宗) 때 구법당(舊法黨)이 정권을 잡자 우사간(右司諫)·상서우승(尙書右丞)을 거쳐 문하시랑(門下侍郞)이 되었다. 그러나 또다시 신법당에 의하여 광둥성[廣東省] 레이저우[雷州]로 귀양갔고, 사면된 후에는 허난성[河南省]의 예창(穎昌)으로 은퇴하였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며, 시문 외에도 많은 고전의 주석서(注釋書)와 《난성집(欒城集)》(84권) 《난성응소집(欒城應詔集)》 《시전(詩傳)》 《춘추집전(春秋集傳)》 《고사(古史)》 등의 저서가 있다.

 

식(軾)과 철(轍)로 두 아들의 이름을 지은 이유   명이자설(名二子說)  -소순(蘇洵)-

老泉先生二子, 長曰軾, 次曰轍. 觀此老之所以逆料二子之終身, 不差毫釐, 可謂深於知二子矣.

迂齋云: “字數不多而宛轉折族, 有無限意思 此文字之妙也.”

輪輻蓋軫, 皆有職乎車, 而軾獨若無所爲者. 雖然去軾則吾未見其爲完車也, 軾乎, 吾懼汝之不外飾也.

天下之車, 莫不由轍, 而言車之功, 轍不與焉. 雖然車仆馬斃, 而患不及轍, 是轍者禍福之間. 轍乎, 吾知免矣.

해석]

老泉先生二子, 長曰軾, 次曰轍.

노천선생은 두 아들을 낳았으니 장남은 식이고 차남은 철이다.

觀此老之所以逆料二子之終身,

노천 생각이 두 아들의 종신을 미리 헤아린 것을 보면

不差毫釐, 可謂深於知二子矣.

터럭만큼도 차이가 없으니 두 아들을 앎에 깊었다고 할 만하다.

迂齋云: “字數不多而宛轉折族,

우재가 말했다. ”글자수는 많지 않지만 뒤바꾸며 흐름을 꺾어

有無限意思 此文字之妙也.”

무한한 뜻이 있으니 이것이 문자의 오묘함이다.”

 

輪輻蓋軫, 皆有職乎車,

바퀴와 바퀴살과 덮개와 수레 뒤턱은 모두 수레에 맡은 게 있으니

而軾獨若無所爲者.

수레 앞턱 가로나무는 홀로 하는 것이 없는 것만 같다.

雖然去軾則吾未見其爲完車也,

비록 그러나 앞턱 가로나무가 없고서 나는 완전체인 수레가 됨을 볼 수 없었으니

軾乎, 吾懼汝之不外飾也.

앞턱 가로나무야 나는 네가 바깥으로 꾸미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天下之車, 莫不由轍,

천하의 수레는 수레바퀴가 없을 수 없지만

而言車之功, 轍不與焉.

수레의 공을 말할 때는 수레바퀴는 이에 참여하지 않는다.

雖然車仆馬斃, 而患不及轍,

비록 그러나 수레가 전복되고 말이 죽더라도 화가 수레바퀴엔 미치지 않으니

是轍者禍福之間.

이것은 수레바퀴가 화와 복의 중간이기 때문이다.

轍乎, 吾知免矣.

수레바퀴야 나는 네가 화를 피할 줄 안다.

軾 수레 앞턱 가로나무 식,  轍 바퀴 자국 철

적벽부(赤壁賦) - 소동파(蘇東坡) -

이해와 감상 : 송나라 원풍(元豊, 송의 연호) 5년(1082) 가을 7월 16일의 달 밝은 밤에 소동파가 적벽에서 뱃놀이를 하며 삼국의 영웅인 조조(曹操)와 주유(周瑜)의 풍류에 비겨 자신의 덧없는 인생을 생각하고, 결국은 저들이나 자신이 다 무한한 생명 앞에서는 모두 덧없는 존재라는 것과, 무한한 본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만물이 다 같은 것임을 깨닫고 시름을 잊는다는 내용을 술회한 명문이다.

적벽강은 한(漢)나라 때 유비(劉備)와 조조(曹操)가 싸웠던 전쟁터(삼국지의 적벽대전)이다.

이 작품은 소식이 황주(黃州)로 유배 갔을 때 친구들과 뱃놀이를 하면서 지은 것인데. 전. 후 적벽부 2편이 있다.

그러니까 이 글에 이어서 쓴 '후 적벽부'도 있다는 것이다.

'부(賦)'는 한문체의 하나로 글귀 끝에 운을 달고 대(對)를 맞추어 짓는다.

때로는 '감상을 느낀 그대로 읊은 글'의 뜻으로도 쓰인다.

이 작품은 중국의 명문(名文)을 가려 뽑은 책인 <고문진보(古文眞寶)>에 들어 있다.

이 작품은 작가가 조정의 비리를 풍자한 혐의를 받아 황주(黃州)로 유배 갔을 때 지은 것이라고 한다.

전편에서 작가는 삼국 시대에 유비와 조조의 군사가 격렬한 싸움을 벌였던 적벽에서 친구들과 뱃놀이를 하면서 옛날을 회고하고 인생과 대자연의 의미를 노래하고 있으며, 후편에서는 적벽의 겨울 풍경이 지닌 아름다움을 감동 어린 시선으로 묘사한다.

한편 이러한 내용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노장(老莊) 사상의 영향을 받은 전편의 뒷부분과 후편이다. 이 부분에서 작가는 자연의 장구(長久)한 시간성에 비하여 순간에 지나지 않는 인생의 짧음을 한탄함으로써 자연으로 귀의하고자 하는 마음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소동파의 아들 교육 [이준식의 한시 한 수]   

<이준식 성균관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님의 글을 옮겨싣는다.>

남들은 자식이 총명하길 바라지만 나 자신은 총명한 탓에 일생을 그르쳤나니.아이가 어리석고 아둔하다 해도 그저 탈 없고 걱정 없이 공경대부에 올랐으면. (人皆養子望聰明, 我被聰明誤一生. 惟願孩兒愚且魯, 無災無難到公卿.) ―‘아들 잔칫날에 장난삼아 짓다(洗兒戱作·세아희작)’(소식·蘇軾·1037∼1101)

소동파는 재능이 출중했지만 강직한 성품에 소신껏 바른 소리를 곧잘 하는 바람에 관료 생활은 파란의 연속이었다. 급기야 정쟁의 와중에서 사형의 위기까지 맞았지만 멀리 후베이(湖北)성 황저우(黃州)로 좌천되면서 목숨만은 부지했다. 그곳에서 얻은 아들이 넷째 소둔(蘇遁). 아기 출생 만 한 달이 되는 날, 풍습에 따라 배냇머리를 깎고 목욕시키는 ‘세아회(洗兒會)’ 잔치 자리에서 이 시를 읊었다. 자식이 총명하길 바라는 게 인지상정이련만 동파는 아들이 어리석고 아둔해도 무탈하기만을 소원했다. 그러고도 공경대부를 기대한다니 여간 모순이 아니다. 언외(言外)의 속내는 무엇일까. 지금 공경대부에 오른 이들이 결국은 어리석고 아둔했기에 무탈했다는 사실을 은근히 빈정댄 것이거나, 자신의 총명이 오히려 일생을 그르친 화근이었다는 회한일 수도 있다. 그도 아니면 ‘큰 지혜를 가진 자는 자기 재능을 과시하지 않기에 언뜻 어리석어 보인다’는 노자의 ‘대지약우(大智若愚)’를 강조한 아비의 당부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화답한 시가 있는데 청대 전겸익(錢謙益)의 ‘반동파세아시(反東坡洗兒詩)’가 흥미롭다. ‘동파는 자식 키울 때 총명할까 걱정했지만/나는 우둔한 탓에 일생을 그르쳤나니./내 자식은 의견 굽히지 말고 수완도 잘 부려서/수단방법 안 가리고 공경대부 되었으면.’ 시제와 표현도 동파를 반박한 듯하지만, 그 역시 수단껏 수완을 잘 부린 자가 공경대부에 올랐다는 ‘일그러진 총명’을 질타한 점에서는 판박이다. 재치가 번뜩인다.

소동파의 시는 송(宋)나라 때부터 중국은 물론 고려나 요(遼)나라 같은 이웃 나라에까지도 널리 알려져 있었던 만큼 독자의 수요에 부응하여 그의 시집 역시 송나라 때부터 시작하여 줄곧 간행되어 왔으며, 이 가운데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도 아주 많다.

1037~1061(1~25세) 성장, 과거급제, 모친상 3년 첫아들 邁(매)갈 매
1061~1071(25~35세) 관직생활, 왕안석과 대립 후 항주로 전출 둘째아들迨(태)미칠 태
1071~1079(35~43세) 항주, 밀주, 서주, 호주 지방관 셋째아들過(과)지날 과
1079~1085(43~49세) 황주로 유배 (신법당을 비판했던 것이 화근) 넷째아들遯(둔)숨을 둔
1085~1094(49~58세) 사면 복권 (신종 사망, 선인태후 섭정, 구법당 복권) 邁 갈 매
迨 미칠 태
1094~1101(58~65세) 담주로 유배 및 사망 (선인태후 사망, 철종 친정, 신법당 복권) 過 지날 과
遯 달아날 둔(원음;돈)

소동파(蘇東坡, 1036~1101)가 우리 문단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했다. 그러기에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세상의 학자들이 처음에는 과거시험에 필요한 문체를 익히느라 풍월을 일삼을 겨를이 없다가 과거에 급제하고 나서 시 짓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면 소동파 시 읽기를 무척이나 좋아하기 때문에 매년 과거의 방이 나붙은 뒤에 사람마다 금년에 또 서른 명의 소동파가 나왔다고 여긴다”라고 했고,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까지는 오로지 만당(晩唐) 시만 익혔고 고려 중엽에는 오로지 소동파 시만 배웠다”라고 했다. 김부식(金富軾, 1075~1151)과 동생 김부철(金富轍)의 이름이 소동파(본명 軾)와 소철(蘇轍) 형제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소동파에 대한 우리 문인들의 추앙심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하겠다. 이렇듯 우리의 선조들은 소동파 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송팔대가 [唐宋八大家]

당나라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송나라 구양수(歐陽修) 소순(蘇洵) 소동파(蘇東坡) 소철(蘇轍) 증공(曾鞏) 왕안석(王安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