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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원과 동작구

코로나19의 고통속에 국립현충원을 걷다.(2020.03.04)

by 도화유수 2020. 3. 5.

김영삼 대통령 묘

 

 

2020년 3월 4일(수) 코로나사태로 외출도 못하고 집안에서 지내는 것도 힘들어 오후에 국립묘지를 걷기로 마음먹고 집을 나선다. 거리엔 사람들이 많이 줄어 한산하다. 사당동 국립현충원 뒷편으로 가는 데에도 힘들다. 그동안 너무 방콕생활을 했는 것 같다. 한참 걷다가 김영삼대통령 묘소라는 표지판을 보고 처음으로 들려본다. 충혼당 바로 옆에 있다.

 

 

 

 

 

 

묘소의 위치가 좋아 보인다.

 

 

 

 

묘소에서 내려다본 충혼당

 

 

이어서 애국지사묘역을 찾는다. 그 중 임시정부요인묘역

 

 

 

 

 

申圭植  1879년 1월 13일 ~ 1922년 9월 25일
대한민국독립운동가. 호는 예관(睨觀), 일민(一民),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1879년 충청도 청주목(現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에서 태어났다.
1895년 서울로 유학하였다. 관립한어학교(官立漢語學校), 육군 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뒤 임관되어 참위, 부위까지 진급하였다.
1905년 고향에서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소식을 듣고 지방 진위대와 연락해 거사를 계획하다가 실패하였다. 음독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목숨은 건졌고, 대신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이후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등 애국 계몽 단체에 참가하였고 중동학교 등의 교육 기관을 설립하였다. 1909년에는 대종교에 귀의하였다.
1911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 이 시기 쑨원과 쑹자오런, 천두슈, 친치메이 등 중국의 혁명가들과 교류하면서 중국동맹회에 가입, 한국인으로 중국의 신해혁명에 참여하였으며, 중국에서 줄곧 독립 운동을 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훗날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대해 쑨원의 호법 정부와 그를 계승한 장제스의 국민당이 지지하게 된다. (친치메이는 장제스가 쑨원 다음으로 존경하는 혁명가이자 친구였다.) 군사 교육도 장려하여 한국 청년들을 중국 각지의 군사 학교에 입학시키기도 하였다. 독립 운동가 이범석손문에게 소개, 운남 육군 강무 학교에 입학시킨 것이 신규식이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앞서 미국 대통령 토머스 우드로 윌슨이 14개조의 민족 자결주의를 발표한 이후 신한 청년당을 조직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11월에 법무 총장에 취임하였다.
1922년 임시 정부의 내분으로 이승만에 대한 대통령 불신임안이 그의 불참 속에서 통과되었다. 이후 지병으로 별세하였다.
사위로 석린 민필호 선생, 외손자로 민영주 지사로 알려져 있다.
가끔씩 독립 운동가 김규식과 헷갈리기도 한다

 

 

노백린[ 1875.1.10 ~ 1926.1.22    

한말의 독립운동가. 신민회()에서 활약하였다. 상하이[], 미국, 블라디보스토크 등을 오가며 항일운동을 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본관 풍천(). 호 계원(). 황해도 송화()에서 출생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의숙[]을 거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귀국하여 육군 정령()에 임명되어 한국무관학교의 교육국장·교장을 역임하였다. 1907년 안창호() 등과 신민회()에서 활약하다가 군대가 해산당하자 고향으로 내려가 광산()·피혁상() 등을 경영하였다.
1914년 하와이로 건너가 박용만() 등과 국민군단()을 창설하여 군사훈련에 힘썼고, 3·1운동 후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총장()을 맡았다. 1920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에서 비행사 양성에 진력하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항일운동에 종사한 후 다시 상하이로 건너가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백린 [盧伯麟] (두산백과)

 

 

김동삼[ ] 1878.6.23 ~ 1937.3.3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독립운동가. 만주에서 신흥강습소를 세우고 민족유일당촉진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878년 경상북도 안동() 임하면 천전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의성이며 본명은 긍식() 자는 한경이다.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이주한 뒤에 자신의 이름을 동삼()이라고 했으며 호 일송()이라고 지었다. 부친은 김계락()이며 대대로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흥락()의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그는 전통적인 한학자로서 공부를 하였지만 1904~5년부터 신학문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신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1907년 고향에서 유인식()·김후병() 등과 함께 협동중학을 설립하여 교감이 되었으며 청소년 교육에 앞장섰다. 또한 신민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민중을 계몽하는 일에도 나섰으며 구국계몽단체인 대한협회() 안동지부에서도 중책을 맡아 활동하였다.
1909년 서울의 양기탁() 집에서 신민회() 간부와 독립운동의 방향을 협의하였으며, 대한협회를 탈퇴하고 대동청년단에 가담하여 활약하였다. 교육을 통해 장차 국가의 독립과 대사를 이끌 인재를 양성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국권피탈 후에는 가족 전체가 만주로 이주하여 1911년 유하현 삼원포에 정착하였다. 이시영(이동녕() 등과 교포의 안정책과 교육문제에 대하여 계획을 세웠다. 만주로 이주해온 한인단체인 부민단을 조직하여 한인의 대소사를 해결하는데 노력하였다. 당시 한인들이 세운 신흥강습소()는 뒤에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였다. 또한 1914년에는 백두산 서쪽에 계곡에 백서농장을 운영하며 수천명의 독립군 양성을 위한 비밀 군영으로 활용하였다. 하지만 백서농장은 열악한 환경으로 농장은 4년만에 폐지되고 말았다. 

1918년 지린성[] 왕청현()에서 서일(신팔균(김좌진() 등 38인이 민족대표로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의 총본산으로 군정부()를 조직하였다.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3.1운동 이후 간도지역으로 이주해오는 한인들이 급증하자 한족회를 조직하여 실질적인 운영을 총괄하는 총무를 맡았다. 또한 군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휘하에 들어가 서로군정서(西)로 개칭되었는데 그 참모장에 취임하였다. 1920년 청산리전투를 지원하였으며 1922년에 조직된 대한통의부 총장으로 선임되었다. 1923년 베이징[]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서로군정서 대표로 참석하여 의장으로 선출되어, 회의를 이끌었으며 독립운동단체를 일원화하는 데 힘썼다. 1925년 지린성 화전현에서 정의부()가 조직되자 참모장 및 행정위원에 취임하였다.

1927년 김좌진·지청천() 등과 조국광복운동의 총기관으로 민족유일당촉진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이 되었고, 농민호조사()를 만들어 재만동포들의 권익신장에 힘썼다. 1931년 만주사변 때 하얼빈[]에서 붙잡혀 본국으로 강제송환,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평양형무소로 이감되었으며 1933년 3월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다시 이감되었다. 1937년 4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고 그의 유해는 화장하여 한강에 뿌려졌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동삼 [金東三] (두산백과)

 

 

 

박은식[ ]    

요약
한말의 유학자·독립운동가. 《황성신문》의 주필로 활동했으며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였다. 대동교(
)를 창건하고 신한혁명당(
)을 조직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859년 9월 30일 황해도 황주()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밀양()이며, 자는 성칠(), 호 겸곡()·백암()·태백광노()이다. 10세 이후 부친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관서지방을 여행하며 주자학 연마에 심혈을 기울여 일찍부터 문명()을 날렸다. 학문적 계보는 분명하지 않으나 일찍부터 신기영()·정관섭() 같은 정약용()의 문인들과도 접촉하면서 그의 실학사상을 체득하였다. 26세를 전후하여서는 박문일()·박문오() 형제에게서 주자학을 본격적으로 사사하였다.
1885년 향시에 합격, 1888∼1894년까지 숭인전참봉·동명왕릉참봉의 벼슬을 지냈다. 1890년대 서울에 거주하게 되면서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을 하였으며, 그의 사상도 종래의 정주학() 중심에서 지행합일()을 강조하는 양명학()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변화를 바탕으로 교육·언론가 또는 민족운동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898년 9월 장지연이 창간한 《황성신문》의 주필로 민중계몽에 나섰고, 만민공동회와 더불어 반봉건·반침략 투쟁을 벌이던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였다. 또한 성균관의 후신인 경학원 강사와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지내면서 교육개혁에 관한 글을 집필하여, 1904년 《학규신론()》을 간행하는 한편, 서우학회(西)를 발기하고 1908년 그 후신인 서북학회의 회장직을 맡기도 하였으며, 기관지 《서우》 《서북학회월보》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교육·학회 활동뿐만 아니라 《황성신문》이 복간되자 자리를 옮겨 10년 폐간될 때까지 일제의 침략상을 고발하는 언론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1909년 《유교구신론()》을 발표하여 유교개혁을 주장하였는데 유교가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유교의 정신이 제왕에 맞추어져 있고 일반 인민사회에 보급하는 정신이 부족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교화에 소극적이어서 대중화에 노력하지 않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주자학으로는 지금의 현실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양명학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였다. 장지연 등과 양명학을 기초로하는 대동교()를 창건하여 종교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유교계를 친일화하려는 일제의 공작에 대항하였다. 그는 민족의 대동 단합과 단결을 강조하며 민족적 통일을 가장 중요한 이념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민중계몽 ·교육 ·언론 활동도 1910년 국권피탈과 더불어 일단 막을 내리고, 1911년 가을 만주 위안런현[]으로 망명하면서 나라 밖에서 구국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한 노력은 나라 잃은 슬픔을 국사연구를 통하여 승화시키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동명성왕실기()》 《발해태조건국지()》 등은 그러한 노력의 결과였다. 1912년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신규식() 등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를 조직했고, 상하이에 박달()학원을 세워 교포자제를 교육했다. 1914년 잠시 홍콩에 머물다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 《국시일보()》의 주간이 되었는데, 이때 《안중근전》과 《한국통사()》를 지었다.
1915년 상하이에서 이상설·신규식과 함께 신한혁명당을 조직하고 이 당의 취지서와 규칙을 작성, 감독으로 선임되었고, 또한 신규식과 함께 대동보국단()을 조직하여 단장이 되었다. 1918년에는 러시아에서 한인교포 잡지 《한족공보()》 발행에 관여하던 중 191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1운동을 맞이하였다. 이에 그는 독립에 대한 확신을 갖고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기 시작, 이듬해 이를 간행하였다.
3·1운동 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사장이 되었고, 1924년 임정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 1925년 3월 이승만의 대통령 면직으로 제2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임정은 독립운동의 이념·방법·지연·인맥 등의 파벌 암투로 내분을 겪고 있었다. 그는 독립운동의 대동단결을 위하여 임정의 헌법을 개정, 대통령제를 국무위원제로 고치고 그 해 8월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무위원을 선임하고 자신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그 해 11월 ‘독립운동을 위한 전민족 통일’을 당부하는 유촉()을 남기고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임정의 국장으로 상하이 정안길로()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94년 정부에 의해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그는 그의 독립활동과 많은 저술들을 통해 독립정신을 함양하고 민족해방운동의 정신적 지주를 유지하려면 무엇보다도 주체적인 역사서술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비록 정신주의적·관념적 역사관에 머물긴 했지만 역사 연구와 서술을 민족해방운동의 한 방법으로 생각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은식 [朴殷植] (두산백과)

 

 

 

 

양기탁[ ]    

요약
한말의 언론인·독립운동가. 1904년 영국인
E.T. 베델과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즈》를 발간하였고 같은해 국한문으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 주필이 되어 항일사상을 고취하였다. 1921년 미국의회의원단이 내한하였을 때 독립진정서를 제출한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호는 우강()이다. 아명은 의종()이다. 평양에서 출생했다. 1895년 영국인 선교사 J.S.게일(Gale:)의 《한영자전()》 편찬을 도왔고, 1904년 영국인 E.T.베델(Bethel:)과 영자신문 《코리아 타임즈》를 발간하고, 같은해 국한문으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 주필이 되어 항일사상을 고취하였다.

1907년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 독립운동에 진력하다가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4년간 복역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 때 편집고문에 취임, 1921년 미국의회의원단이 내한하였을 때 독립진정서를 제출한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가()출옥 후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의성단()을 결성하였으며, 오동진(김동삼() 등과 통의부()를 창설하고, 1925년 지청천()·김동삼 등과 정의부()를 조직하여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에 힘썼다. 이때 화흥중학교()·화성의숙()·동명의숙()을 세워 혁명간부양성에 힘쓰는 한편, 잡지 《전후》와 《대동민보()》를 발행하여 재만한인 계몽에 진력하였다. 1926년 고려혁명당()을 결성하여 정의부의 무장투쟁을 지원하였다.

193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국무위원회에서 주석으로 선출되어 1935년까지 재임하였다. 1938년 장쑤성[]에서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양기탁 [梁起鐸]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