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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원과 동작구

동작구 명소 나들이(효사정 용양봉저정 사육신공원)

by 도화유수 2018. 3. 25.

<용양봉저정>

 

 

 

 

 

2018년 3월 24일 16시 동작역1번출구에 4명의 친구가 정시에 만나서 한강으로 내려간다.

 

명수대 [明水臺]

동작구 흑석동에 있던 마을로서, 명수대라고 하는 별장이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명수대는 서달산 꼭대기에 있던 건축물로 1920년 일본인 부호 목하영(木下榮)이 이곳에 별장을 짓고 놀이터를 만든 다음, 맑은 한강물이 유유히 흐르는 경치 좋은 곳이라고 하여 붙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광복 후 이 건물은 철거되었다. → 흑석동 [법정동]

 

명수대를 지나 흑석초등학교 옆으로 9호선 흑석역을 돌아서 효사정으로 향한다. 효사정은 곳곳이 공사중이라 올라가는 계단까지 접근이 어렵다.

 

 

효사정孝思亭

효사정은 세종조에 한성부윤과 우의정을 지낸 노한대감의 별서였다. 노한대감의 자는 유린이며 시호는 공숙공이다. 노한대감이 모친을 여의고 3년간 시묘를 했던 자리에 정자를 짓고, 북쪽 개성에 있는 아버님 산소를 바라보며 추모했던 곳이다. 당시 이조판서 강석덕이 효사정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이 정자는 효사정의 제자리를 찾기 위해 정인지, 서거정 등의 시문과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찾고 하였으나, 주위환경 변화로 부득이 이 자리를 선정하여 신축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 5량 집 구조와 검소한 인도리가구 구조의 팔작기와 지붕에 온돌방 1칸을 겸한 정가형식으로 주위에 난간을 둘렀다.

 

 

 

 

 

 

 

 

 

 

 

 

 

 

 
효사정을 지나서 한강을 따라 걷다가 한강대교지점에서 좌측으로 용양봉저정을 향한다.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

서울 동작구 본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누정. 정면 6칸, 측면 2칸.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호.

정면 6칸, 측면 2칸.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호. 가운데에 온돌방을 두고 양쪽에 툇간을 두었고, 사방에는 띠살분합문을 달았고, 이중량(二重樑)을 둔 오량구조, 겹처마집으로 간소하면서도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현재 노량진 수원지 건너편 작은 언덕에 있다. 정조는 효심이 지극하여 아버지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가 있는 수원 화산(華山)의 현륭원(顯隆園)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그 때마다 노들강(지금의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가설하여 건넜는데, 시간이 걸렸으므로 잠시 어가(御駕)를 머물게 하고 쉴 자리가 필요하여 이 정자를 지었다 한다.

축조연대는 1789년(정조 13) 이후로 보고 있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점심을 들었기 때문에 일명 주정소(晝停所)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전하여진다. 처음에는 정문과 누정 등 두세 채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용양봉저정만 남아 있다.

 

용양봉봉저정을 지나 9호선 노들역 1번출구로 나와서 사육신공원을 향하는 도중에

 

봄냄새가 완연하다.

 

오늘은 미세먼지가 조금 심하다.

 

사육신공원死六臣公園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된 사육신묘는 오늘날 성역으로 가꾸어져 있다. 한강 인도교와 노량진역 중간의 높은 언덕에 자리한 사육신묘는 조선조 단종을 강제로 내쫓고 왕위를 빼앗은 세조에 항거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김문기 등 일곱 충신 절사의 묘역이다.

숙종은 1681년 사육신의 충성심을 기리는 듯에서 이곳 산 기슭에 '민절서원'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총 면적 49,40㎡에 33종 15,000주의 수목으로 조경된 사육신 공원에는 사당인 의절사, 홍살문, 삼문(불이문), 육각비, 신도비 등이 있다. 신도비 비각과 마주보고 있는 육각형의 사육신비는 1955년에 세워진 것이다.

사육신공원은 봄이면 벚꽃 등 갖가지 꽃들이 피어나고 여름에는 녹음이 시원해서 시민들이 사육신의 충정도 생각할 겸 휴식 차 많이 찾는다.

 

사육신묘

조선 세조 2년(1456) 조선의 6대 임금인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목숨을 바친 박팽년(박씨지묘)·성삼문(성씨지묘)·이개(이씨지묘)·하위지·유성원·유응부(기계유씨지묘) 6명의 신하 즉 사육신(死六臣)을 모신 곳이다.

이들은 단종 3년(1455)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뒤의 세조)이 왕위를 빼앗고 단종을 몰아내자 이에 분개하여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는 가묘가있다.

사육신의 충성심과 장렬한 의기를 추모하기 위해 숙종 7년(1681)에 이곳에 서원을 세우고, 정조 6년(1782)에는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우는 비)를 세워 두었다.

1955년에는 사육신비를 세우기도 하였고, 이후 묘역을 확장하여 새롭게 정비하여 충효사상을 기리고자 하였다. 원래의 묘역에는 박팽년·성삼문·유응부·이개의 묘만 있었으나 후에 하위지·유성원·김문기의 묘도 만들어 함께 모시고 있다.

 

 

입구의 불이문

 

 

 

 

 

의절사

 

신도비

 

육각비

 

 

의절사 뒤편에 사육신의 묘소가 있다.

사육신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1445년)으로부터 왕위를 빼앗고, 왕이 되자 이에 불복하고 단종 복위에 힘 쓰다 목숨을 잃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에 추가로 김문기를 현창하여 모신 곳이다. 이들은 단종 3년(1455년)에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분개하여 단종의 복위를 노리던 중, 1456년 6월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과 유응부가 세조 일파를 처단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이 사실이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이들의 계획이 좌절되자 거사 동지이며 집현전 출신인 김질(金礩) 등이 세조에게 단종복위 계획을 밀고하여 연루자들이 모두 붙잡혔다.

성삼문은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꿰고 팔을 잘라내는 잔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세조를 ‘전하’라 하지 않고 ‘나리’라 불렀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진상을 자백하면 용서한다는 말을 거부하고 형벌을 받았다.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는 단근질로 죽음을 당하였고, 하위지는 참살 당하였다.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하였고, 김문기(金文起)도 사지를 찢기는 참혹한 형벌을 받아 사망하였다. 이밖에 사육신의 가족으로 남자인 경우는 모두 죽음을 당하였고, 여자의 경우는 남의 노비로 끌려가는 등 70여명이 모반 혐의로 화를 입었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김문기()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한 성승ㆍ박팽년ㆍ유응부ㆍ성삼문ㆍ이개 등은 처형된 뒤에 한강 기슭 노량진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정조 때인 1782년 이곳에는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는 신도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1955년에는 신도비와 마주보는 위치에 육각의 사육신비가 세워졌다. 1978년에는 묘역을 크게 넓히고 의절사()ㆍ불이문()ㆍ홍살문ㆍ비각() 등을 새로 지어 단장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성승의 묘가 훼손되어 전해지지 않아 원래 이곳에는 박팽년ㆍ유응부ㆍ성삼문ㆍ이개의 묘만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하위지ㆍ유성원의 가묘()가 새롭게 조성되었다.

한편, 1977년 김문기의 후손인 김녕() 김씨() 문중을 중심으로 유응부 대신 김문기가 사육신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조선왕조실록≫의 세조 2년 6월 6일조의 기사에서 성삼문ㆍ이개ㆍ유성원ㆍ박팽년ㆍ하위지ㆍ김문기 등 여섯 명에 중점을 두어 거론하고 있는 것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이를 둘러싼 논란이 확산되자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는 김문기의 공적도 현창(, 밝혀 나타냄)하기 위해 노량진의 사육신 묘역에 김문기의 가묘도 함께 조성하도록 결정했다. 그러나 사육신의 구성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자 1982년 국사편찬위원회는 김문기의 공적을 널리 알리되 종전의 사육신 구성에는 변경이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도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는 김문기를 포함해 모두 일곱 명의 무덤과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사육신의 구성을 둘러싼 논란도 되풀이되어 나타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육신 [死六臣] (두산백과)

 
사육신 역사관

 

 

상촌 신흠의 시

매일생한불매향-매화는 일생동안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政府宴

                                                               박팽년(朴彭年)

 

廟當深處動哀絲(묘당심처동애사)   묘 당 깊은 곳에 거문고 울릴 때

萬事如今摠不知(만사여금총부지)   모든 일을 자세히 알 수 없구나

柳緣東風吹細細(유연동풍취세세)   실버들 동풍에 가늘게 흔들리고

花明春日正遲遲(화명춘일정지지)   꽃핀 봄날은 길기도 하구나

先王大業抽金櫃(선왕대업추금궤)   선왕의 큰 업을 칭찬할 때

聖主鴻恩倒玉扈(성주홍은도옥호)   성주의 큰 은혜 술잔에 가득하여라

不樂何爲長不樂(불낙하위장불낙)   즐거운 이날의 계속되는 놀이 속에

呂歌醉飽太平時(갱가취포태평시)   태평한 세월이 오래 깃 들겠구나

 

 

예전에 그냥 지나쳤던 사육신역사관에서 정말 좋은 교육적 가치를 보았다. 다음에 좀더 자세히 보고싶다.

 

 

 

전망대를 돌아서 홍살문을 지나서 노량진 수산시장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