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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국내여행

겨울에 찾은 창덕궁과 후원(2022.03.04)

by 도화유수 2022. 3. 6.

창덕궁 인정전
후원 부용지
후원 옥류천

2022년 3월 2일 수요일
[오후 12:35] 3월4일(금) 오후 2시 창덕궁 매표소에서 만납시다.
창덕궁 전각둘러보고 3시에 후원입장합니다. 후원은 이미 예매했습니다.

2022년 3월 4일 금요일]

오늘은 간편복장으로 오후2시 안국역 3번출구에서 직진 300m 매표소 부근 벤치에서 만나요.

 

후원입구에서 15시에 가이드의 해설을 곁들여 후원관람이 시작된다.

芙蓉亭(부용정)

연꽃 향기 머금은 신선의 세상, 창덕궁 부용정

부용정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덕궁 내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이다. 보물 제1763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래 숙종이 1707년(숙종 33)에 지은 택수재(澤水齋)를 1793년(정조 17)에 정조가 고쳐 지으면서 부용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부용정이 있는 부용지 주변은 창덕궁 후원에서도 가장 넓고 짜임새 있게 구조가 갖추어진 아름다운 휴식 공간이다.

부용정(芙蓉亭)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번지 창덕궁 내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이다. 보물 제1763호로 지정되어 있다. 창덕궁의 동궁이 있던 곳에서부터 시멘트 길을 따라 언덕을 넘어가면 네모난 호수와 함께 먼발치에 주합루(宙合樓)와 규장각(奎章閣), 그리고 영화당(暎花堂)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호수 가에 도착하면 남쪽으로 비록 주합루보다는 작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전혀 위축됨이 없이 도도하게 자리하고 있는 정자가 보인다. 이 건물이 부용정이고, 그 앞에 있는 호수가 부용지(芙蓉池)다.

 

창덕궁 부용정 전면

『궁궐지(宮闕志)』에 의하면 부용정은 1707년(숙종 33)에 지은 택수재(澤水齋)를 정조가 고쳐 지으면서 부용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연못 안에 채색하고 비단 돛을 단 배가 있어 정조 임금께서 꽃을 감상하고 고기를 낚던 곳‘이라고 하였다.

정조가 부용정을 고쳐 지은 것은 1793년(정조 17)이다. 이때 정조는 직접 상량문을 지어 이를 기념하였다. 그가 지은 상량문은 『홍재전서(弘齋全書)』 제55권에 전한다. 상량문에는 정조가 왜, 어떤 목적에서 부용정을 지었는지 잘 나타나 있다. 정조는 창덕궁 후원의 아름다운 경치에 비해 숙종 때 지은 택수재가 낡고 기울어졌을 뿐 아니라 일부가 허물어져 주위 경관과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정자를 새로 짓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 과정에서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검소하고 소박한 규모로 하되 신선이 살았다고 하는 중국 정원에 비추어 손색이 없도록 연꽃을 심어 군자의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였다. 나아가 건물이 주위의 자연환경과 잘 어울리도록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살리되 외형적 규모를 『주역』의 대장괘를 취하도록 하여 나라가 왕성하고 굳건한 기운을 갖기를 희망하였다. 또한 정자의 내부로 드나드는 방과 마루에 가인괘를 취한 것은 가정의 평화와 윤리를 바로 세우기 위함이다. 상량문에서 보듯이 부용정은 정조의 국가 운영 철학과 풍류의 뜻이 동시에 담겨 있는 건물이다.

정조는 부용정 건물을 완공하고 난 후 1795년(정조 19) 3월 이곳에서 대대적인 연회를 베풀었다. 이 해는 정치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마음의 고통을 간직해 왔던 그가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화성에 다녀온 해이다. 그는 어머니에 대한 일말의 부담을 덜어낸 듯 너무 기쁘고 즐거운 나머지 ‘올해야말로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경사스러운 해이다.’라며 창덕궁 후원에서 규장각 신하들과 함께 54명이 모여 잔치를 베풀었다.

이 연회에 참여한 사람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다. 정약용이 정조의 총애를 받아 규장각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있을 때의 일이며, 다산은 정조의 명을 받고 연회에 참석하였다. 그는 이 연회에 참석한 것을 매우 황공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문집에 「부용정시연기(芙蓉亭侍宴記)」라는 글을 남겼다.

 

창덕궁 부용정 전경

위의 정조와 정약용이 남긴 글을 종합하면 어머니의 회갑연을 마친 뒤 기분이 홀가분해진 정조가 자신의 정국 운영에 도움을 준 신하들을 불러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부용지에 둘러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기를 잡고, 고기를 낚을 때마다 한 쪽에서는 음악을 연주하고, 연못에 배를 띄워 즉흥적으로 시를 짓되 시를 짓지 못하면 작은 섬에 가두어 귀양을 보내는 퍼포먼스도 연출하였다. 물론 잡은 물고기나 섬에 가둔 사람들은 나중에 모두 풀어주었기 때문에 목적이 고기를 낚거나 사람을 핍박하고자 하는 데 있었던 것은 아니다. 모두가 왕과 신하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이른바 소통을 나누는 계기로 삼았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정조가 누정의 이름을 부용정이라 한 것은 연꽃에서 따온 것이다. 중욱 후한(後漢)의 학자 허신(許愼)은 ‘활짝 핀 연꽃은 부용이라 하고, 피지 않은 연꽃을 함담(菡萏)이라 한다.’고 하였다. 부용지 주변은 창덕궁 후원에서도 가장 넓고 짜임새 있게 구조가 갖추어진 아름다운 휴식 공간이다.

부용정 건물의 평면은 ‘정(丁)’자와 ‘아(亞)’자가 교묘하게 결합된 형태이다. 사방 어느 곳에서 보아도 문들이 서로 마주 보이는 형태로 만들었다. 하늘에서 바라보면 지붕이 ‘십(十)’자 모양으로 보여 네 방향이 모두 같다. 물론 지붕의 형태도 모두 팔작지붕으로 지었다. 방 주위에는 난간을 둘렀으며, 따뜻한 방과 시원한 누마루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중에서도 기둥 두 개를 물에 담그고 있는 부분의 난간은 일반 난간보다 약간 높다. 물론 왕이 앉는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처마 곡선은 물을 박차고 오르는 물새의 날개 같이 날렵하게 위로 향하고 있다. 누마루에 앉아서 바라보는 부용지와 어수문(魚水門), 그리고 주합루의 모습은 그야말로 절경이다. 정조가 누마루에 앉아 연회를 즐기는 모습을 상상하면 나도 모르게 흥에 겨워 절로 어깨춤이 추어지는 기분이다.

정조가 상량문을 쓰면서 함께 남긴 시가 있다. 대들보를 위와 아래, 동서남북으로 들어 올리는 것을 운으로 삼아 지은 이 시에는 나라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정조의 마음이 담겨 있다.

한편 부용정에는 다른 궁궐의 누정과 마찬가지로 주련(柱聯)들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들 주련에는 그 누정이 추구하고자 하던 이상이 담겨 있다. 부용정 건물 기둥마다 걸린 주련의 시구는 부용지 일원을 여러 신선이 살고 있는 불국토의 세계로 묘사하고 있다. 돌계단이 있는 부용정 입구 오른쪽 기둥부터 시계방향으로 걸린 주련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천 떨기 고운 빛깔 아리땁게 흐르는 저녁 노을[千叢艶色霞流彩]

십 리의 맑은 향기 사향노루의 열린 배꼽[十里淸香麝裂臍]

낭원(閬苑)의 여러 신선들 푸른 일산을 펼쳐든 듯[閬苑列仙張翠蓋]

대라(大羅)의 많은 부처들 향성(香城)을 에워싼 듯[大羅千佛擁香城]

푸르고 붉은 빛이 거울 같이 맑은 물 속에 어우러지고[翠丹交暎臨明鏡]

꽃과 잎 모두 향기를 품어 아름다운 발에 스며드네[花葉俱香透畵簾]

해맑은 꽃잎 삼천 궁녀의 불그레한 볼이요[晴萼三千宮臉醉]

연잎에 구르는 빗방울 오백 부처의 둥근 염주라네[雨荷五百佛珠圓]

거북이와 물고기가 가을 물속에 한가로이 헤엄치고[龜戱魚游秋水裏]

초가을 서늘한 때 이슬 짙고 바람 좋도다[露繁風善早凉時]

 

부용지에 피어난 연꽃 향기가 사향처럼 십 리에 걸쳐 퍼지는 가운데 연꽃의 맑고 깨끗한 모습은 부처님의 상을 나타내고, 넓은 잎은 신선들의 우산이 되며, 연꽃은 삼천의 궁녀요, 연꽃 잎 위에 구르는 빗방울은 염주가 된다고 하였다. 거북이와 물고기가 유유히 헤엄치는 연못은 무한한 평화로움을 상징하는 세계다. 주련의 내용만으로도 이 일대는 탈속적이면서도 자유롭고 낭만적인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애련지
연경당

 

농수정
선향재 : 서재겸 손님맞이방 고종때 차광 장치

 

승재정

 

관람정
존덕정
폄우사
취한정(翠寒亭)
청의정(清漪亭)

 

2021년 6월 29일창덕궁 도보탐방과 후원 답사후 구요셉 선배 선생님이 제작한 동영상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