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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국내여행

과천 효자최사립정문을 찾아서(2022.02.26)

by 도화유수 2022. 2. 26.

과천문화원옆에 있는 효자최사립정문

토요일 오전에 평소에 가보고 싶은 과천시 문원동을 찾아간다. 어제 사전에 탐사계획을 세우고 오늘 2월 26일(토) 08:30 집을 나선다.

 

4번출구로 나온다는 것이 반대방향으로 나와서 5번출구로 나왔다. 카카오지도로 확인해보니 이렇게 나오는 것이 더 나은 듯하다.  나오니 바로 경기과천교육도서관이 있고 과천 현충탑이 있다.

과천 현충탑[果川顯忠塔]

경기도 과천시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현충탑.

경기도 과천시 별양동 2-5번지의 중앙공원 내에 있는 현충탑(顯忠塔)이다. 건국 이후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영령을 추모하고, 지역 주민에게 애국심을 고양시키기 위해 건립하였다.

탑은 지름 20m의 원형 제단 위에 3개의 원호 기둥을 서로 등지게 배치하였다. 비신은 높이 15m의 철근 콘크리트를 세우고 화강암을 12층으로 덧붙여 마감하였다. 정면에는 청동인물상을 세워 애국선열의 충정을 기렸다. 청동인물상 아래에는 시인 김태수(金汰洙)가 짓고, 서예가 정영채(鄭榮采)가 글씨를 쓴 명문이 새겨져 있다.

   헌시 

날파리는 하루

꽃은 열흘

권세는 십년

인생은 백년

예술은 천년

시간과 공간은 무한

사랑은 영원

생명을 조국에 바친

영령이시여!
영원히 살으소서

      시인 김태수(金汰洙)

 

효자최사립정문孝子崔斯立旌門

대한민국 과천시의 향토유적 제3호(1998년 1월 12일 지정)

최사립(崔斯立)은 1505년 과천 막계(果川莫溪)에서 출생하여 살았던 효자로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그 지극한 효행(孝行)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정각은 소실(燒失)되고 하사받은 액자(額字)만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으므로, 충효 정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하여 과천시에서 1995년에 정각을 복원하고 2011년도에 지금의 위치(경기 과천시 문원로 40-2)로 이전하였다

벽상갈화

어버이 봉양(奉養)하는 효자(孝子 )  최사립(崔斯立)

옛 과천현 막계리(현 막계동)에는 『삼강록(三綱錄)』에 기록된, 효자 최사립(崔斯立)의 무덤과 함께 벽상갈화(壁上葛花)의 전설이 전해져 온다.

그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최결(崔潔)의 아들로서, 지행(志行)이 뛰어나고 경학(經學)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특히 부모를 모심에 있어서 한결같이 『소학(小學)』에 준거하였다.

평소에 술을 좋아하시던 아버지가 그로 인하여 병을 얻었다. 때는 엄동설한이었는데, 환자가 갈화탕을 몹시 찾았다. 최사립은 벽 앞에 무릎을 단정히 꿇고 앉아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그러자 돌연 벽상에 갈화가 만발하는게 아닌가. 그는 그 꽃을 따서 정성을 다해 갈화탕을 만들어 아버지께 봉진하였다. 이에 부친의 병환이 쾌유되었으니, 진실로 효성의 지극함에 천지신명이 감동한 까닭일 것이다.

또 최사립은 모친이 몹시 아플 때에도 지극 정성으로 보살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최사립은 어머니의 병이 몹시 심해지자 손가락을 베어 단지해 모친을 구원했고, 모친이 돌아가신 후 홀로 남은 부친을 기쁘게 하고자 친척 일가를 불러 모아 날마다 술과 고기를 대접했다’고 기록했다.

최사립의 이러한 지극한 효성은 1535년(중종 30년) 4월에 경기도 관찰사 윤은필이 장계를 올려 왕에게까지 전해졌다. 중종은 효자문을 세우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여 흔쾌히 허락하고 그를 표창하도록 했다고 한다.

마침내 1574년(선조 7년) 유신들의 건백에 따라 선조는 효자 배천군수 최사립을 통정대부 이조참의로 추서하고 그의 효행을 후세에 전했으며, 이후 ‘삼강행실록’에도 그 사적을 기록했다.

최사립의 ‘효자정문’은 1995년 과천동 351-10번지에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홑처마 양식으로 복원했다.

과천 일대의 엄청난 변화 속에서 최사립의 무덤마저 지난 1979년 용인군 남사면 완장리로 이장하여 지금은 벽상갈화의 전설만 효행의 예화로 전해지고 있을 따름이다.

(『시흥군지(始興郡誌)』, 상(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