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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국내여행

세한도를 찾아서(2022.02.17)

by 도화유수 2022. 2. 21.

세한도 그림
세한도(국보180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오랫동안 가보고 싶은 곳 <과천 추사박물관>을 찾는다.

추사박물관(과천)

위치 경기도 과천시 추사로 78 (주암동)

과천은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4년간 과지초당에서 지내면서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며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운 곳이다. 이에 추사가 꽃피웠던 학문과 예술의 정수를 널리 알리기 위해 과천시가 추사박물관을 개관하였다. 추사박물관은 추사를 종합적으로 연구, 전시, 체험할 수 있도록 추사의 생애실, 학예실, 후지츠카 기증실, 기획전시실과 체험실, 휴게공간, 뮤지엄숍, 교육실을 갖추고 있으며 박물관 야외에는 과지초당이 있다.

독우물 : 독(항아리)를 묻어 우물을 만들었기에 독우물.&amp;amp;nbsp;
과지초당

평생모은 추사 자료 과천시에 기증한 부자(父子)이야기

1945년 1월 동경의 한 병실을 두 달째 끈질기게 드나드는 조선인이 있었다. 서예가 손재형 씨다. 병실에 누워 있는 사람은 66살의 후지츠카 치카시 (藤塚隣, 1879-1948) 씨로 일제강점기 때 조선 경성제국대학 교수 출신 추사 연구가이다. 손재형 씨가 병실을 드나든 것은 다름 아닌 김정희의 ‘세한도’를 받아내려는 것이었다.

어째서 세한도는 동경의 한 병실에 누워 있는 후지츠카 손에 들어간 것일까? 국보 180호인 세한도의 운명이 일각에 놓였던 그 순간이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양손에 땀을 쥐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세한도를 받아 낸 3개월 뒤 후지츠카의 조선 보물창고는 미군의 도쿄대공습으로 거의 불타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후지츠카 씨는 동경제국대학 중국 철학과를 졸업한 이래 47살 때인 1926년 조선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부임한다.

이후 14년간을 조선에서 교수직을 하면서 추사연구에 몰두하는데 조선에 부임하기 전 그는 북경에 1년 동안 체류한다. 전공인 중국철학 자료 수집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북경에서 바뀌었다. 그는 중국인들이 추사의 학문세계를 높이 사고 있음을 발견하고 추사라는 인물 연구에 관심을 두게 된다. 말하자면 경성제국대학 교수 부임이 추사연구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그 뒤 후지츠카 씨는 조선에서 추사에 대한 많은 자료를 수집하였다. 손재형 씨는 그런 후지츠카 씨를 병원으로 날마다 찾아가 간청하기를 ‘세한도는 조선의 것이다. 돌려 달라.’고 끈질기게 설득한다. 그 집요한 의지 때문일까? 결국, 후지츠카 씨는 아무런 조건 없이 세한도를 손 씨에게 넘겼다.

식민지 당시 조선 땅의 귀한 것들은 헐값 또는 반강제적으로 손쉽게 일본인 손에 넘어간 것들이 많은데 세한도처럼 순순히 돌아온 것은 많지 않다. 천만다행이다. 후지츠카 씨는 그의 아들 후지츠카 아키나오(藤塚明直, 1921-2006)에게 ‘조선의 유물은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유언했다.

그렇다해도 아들이 아버지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팔아먹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잘 지켰다. 아들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2006년 2월 자신이 모은 영화관련 자료와 아버지가 모은 추사 친필 글씨 26점, 추사와 관련된 서화 류 70여 점 등 1만여 점을 과천시에 기증하면서 현금 200만 엔까지 추사 연구에 보태라고 보냈다.

그리고 그는 유물을 모두 기증한 뒤 그해 94살로 숨을 거둔다. 세한도가 개인 소장품으로 조선 땅을 떠난 것은 유감이지만 무탈하게 조선으로 돌아온 것은 다행이다. 그 숨은 공로자는 손재형 씨이며 후지츠카 부자의 고운 마음씨도 일조를 했다.

과천에 문을 연 추사박물관에 가면 후지츠카기증실이 있는데 아버지 후지츠카치카시와 아들 아키나오가 평생 모은 추사 김정희의 자료를 볼 수 있다.   

*추사박물관: 02-2150-3650

 

손재형(孫在馨 1903~1981) 진도 출신의 현대 서예가. 호는 소전(素筌) 예술원 부회장, 제4·8대 국회의원 등을 지냈고 ‘서예’라는 말을 창안하였다. 일본으로 반출된 세한도를 되찾아온 인물로도 유명하며 「팔마유풍(八馬遺風)」이 대표작이다.

세한도그림과 손재형의 사연

'추사 김정희'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살았던 조선의 문인입니다. 김정희의 '세한도'는 많은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은 국보입니다. 현재 국보 180호로 지정되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서예가이며 고서화 수집가였던 '손재형의 열정 덕분에 제2차 세계대전의 불길 속에서 건저 져서 우리가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는 아시아를 침략한 후 1940년대에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일본으로 수집되어 갔었다 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사연인 것입니다.

1940년대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는 엿유물이 마구 거래되는 암흑기를 맞았습니다이때 추사 김정희를 흠모하는 일본의 한 학자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후지쓰카 지카시' 교수였습니다. 그는 김정희의 수많은 작품들을 수집하는데 노력했습니다. 19 40년 초반경성제국대학에 동양철학 교수로 있던 후지쓰카 지키시는 경매에 참여하여 마침내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그림을 차지 했습니다.

그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선의 고서화 수집가 손재형은 어떻게든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찾아오고 싶었습니다.

손재형은 후지쓰카 지카시 교수에게 접촉하여 김정희의 세한도를 넘겨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후지쓰카 지키시는 추사 김정희가 좋아서 수집하는 것이므로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넘겨줄 수 없다고 냉정하게 잘라 말했습니다. 그리고 1944년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국보급 유물을 넘겨줄 수 없었던 손재형은 거액의 자금을 마련해서 일본까지 쫓아갔습니다. 일본은 연합군의 공습에 의해 매우 위험한 곳이 되었지만, 손재형은 각오하고 위험을 무릅쓴 것입니다. 석 달도 넘게 손재형이 찾아오자 마침내 후지쓰카 지카시도 그의 끈기와 진정성에 감복했습니다.

마침내 손재형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그림을 양도 받아서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연합군의 공습에 후지쓰카 지카시의 집이 불타버렸습니다. 그가 수집했던 추사 김정희의 다른 작품들도 많이 불타버렸습니다. 하마터면 우리의 문화재 세 한도가 한줌의 재로 변할 뻔 했던 것입니다. 명화처럼 아슬아슬한 순간을 넘기고 한국으로 돌아온 세한도지만, 그 후에도 역경은 계속되었습니다. 손재형이 정치에 들어서며 자금압박을 받아 고리대금업자에게 담보로 맡겨진 것입니다. 결국 손재형은 소유권을 포기했는데, 수장가 '손세기'에 의해 인수 되어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추사 김정희와 손재형, 그리고 손창근

추사 김정희는 조선 후기인 1786년부터 1856까지 살았습니다. 헌종 때 성균관대사성과 이조참판에 올랐으며, 노론 계열이었 지만 북학파가 된실학자입니다. 박제가와 '박지원의 문인이며, 김정희의 학문계열에는 '흥선대원군'이 있습니다. 고등학파야기도 한 유학자 김정희는 서예, 그림, 금석학에서 대가입니다. 금석학'이란 돌이나 금속에 새겨진 글자를 연구하는 학 문입니다. 주사 김정희의 '추사체'는 옛비문의 글자를 연구해서 만들어진 독특한 글씨체입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그림을 살려낸 인물 손재형은 소전이라는 호를 가진 서예가이며 고서화 수집가입니다진도의 갑부집 아들 로 태어나 간송 전형필 다음가는 수장가였다고 합니다. 소전 손재형도 추사 김정희처럼 금석문 연구가였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 의 글씨체는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소전 손재형이 최초로 서예라는 말을 만든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그 전엔 서예를 글 쓰는 법이라 하여 서법(書法)이라고 했었지만, 손재형 이후엔 글 쓰는 예술이라는 뜻인 서예(書藝)라고 하게 되었다는 얘깁니다

 

소전 손재형이 위험을 각오하고 일본까지 가서 구해 온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그림은 그 후에도 역경은 계속되었습니다. 손재형이 정치에 들어서며 자금압박을 받아 고리대금업자에게 담보로 맡겨진 것입니다. 결국 손재형은 소유권을 포기했는데, 수장가 개성 갑부 출신의 상인 손세기가 인수하였습니다. 세한도는 손세기의 아들 '손창근'이 이어받았고,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되었습니다. 기증은 소유권을 포기하는 것이며 기 탁은 관리를 맡기는 것이므로 아직 소유권은 손창근에게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덕분에 지금 우리는 추사 김정희의 뜻 깊은 세한도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손창근은 골프장 등의 난립으로 산림이 훼손되는 것을 반대하며 1000억 원대의 산림을 국가에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수묵화인 세한도는 김정희가 '윤상도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 귀양을 가 있던 중, 1844년에 그린 그림입니다. 당시 역관 중에 '이상적'이란 인물이 있었는데, 김정희를 스승처럼 생각하며 중국에 두 번이나 가서 책을 구해 오기도 했습니다. 이에 감복한 추사 김정희는 세한도그림을 그려 주었다고 합니다.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 잣나무에 비유해서 그린 그림입니다. 다른 나무는 다 낙엽 져 떨어져도 추운겨울 가장 늦게까지 잎을 견디는 소나무와 잣나무는 지조를 상징합니다.

즉 "선비는 권세가 있을 때나 힘이 없을 때나 똑같은 인품을 지녀야 한다"는 의미로 이상적을 칭찬한 것이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의 뜻 입니다. 권력을 잃고 귀양을 살고 있어도 한결같이 대하니 고마웠을 것입니다. 이상적도 추사의 그림을 받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감격하는 마음을 적어 세한도 옆에 붙였고, 중국에 가지고 가서 명사들의 소감도 받아서 불어 이었습니다. 그래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두루마리 형태의 긴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듯이, 문인화는 그림 자체보다 상징하는 뜻과 사 연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세한도의 자취
김정희→이상적→김병선→김준학→민규식→후지츠카 부자→손재형→손창근 부자(부친 : 손세기)→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