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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국내여행

노적봉공원에서 만난 성호와 단원(2022.01.02)

by 도화유수 2022. 1. 2.

노적봉공원 휴게실
성호박물관
단원미술관

노적봉공원

상록구 성포동 산39-1 일원 공원관리사무소 : 031)481-3179

소개 2016년 10월 재탄생한 노적봉 폭포 공원은, 자연석으로 만든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인공폭포를 비롯해 공원 내 조성된 여러 시설이 있어 남녀노소 모두를 위한 도심 속 쉼터로 자리잡고 있다.

상세정보 노적봉 정상에서는 안산 시내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고, 산기슭을 순환하는 2.5km의 산책로는 계절 별 특색이 뚜렷하여 관광객과 시민들이 자주 찾는다.

노적봉폭포는 노적봉공원에 조성된 가로 133m, 높이 23m의 자연석폭포이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줄기는 안산시의 상징물 중 하나이며, 인공폭포 앞에 마련된 공간은 어린이들의 물놀이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또한 공원에는 배드민턴장과 농구장이 있어 항상 시민들로 북적인다.

 

노적봉의 유래

안산시 고잔동에서 안산시 성포동 성머리 북쪽 입구 노적봉 기슭에 당집이 있었는데, 어업을 생계로 하는 사람이면 바다에 나가기 전에는 반드시 이곳에 들러 사해용왕과 산신에게 무사할 것을 빌었다. 그리고 매년 음력 정월이면 대동 사람이 힘을 모아 큰 굿을 하는 등 일년 내내 무고와 태평을 빌던 곳이다. 그래서 이 신당은 언제나 젯떡과 젯밥이 차려져 있었다.

성포동 뒷산에 있는 이산을 옛날에는 가사미산(可使美山]이라 불렀으며 높이는 해발 155M이다. 노적봉이라 부르게된 유래는 어느 날 당의 무녀 꿈에 신령이 나타나 현몽하기를 “너희가 매일 나에게 드리는 정성이 모여 산 만해질 것이니 이 산 이름을 노적봉이라 부르라” 하였다 한다.

그후부터 가사미산을 일명 '노적봉'이라 불렀다.

 

오후 1:30 에 사당동에서 바로 차로 가니 43분 걸려서 노적봉 공원에 도착.

 

성호박물관에 들어간다.

이익[ 李瀷 ] (1681년(숙종 7) ~ 1763년(영조 39))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자신(子新), 호는 성호(星湖).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실용적인 학문을 주장하며 평생을 학문 연구에만 몰두했다.

《성호사설(星湖僿說)》과 《곽우록(藿憂錄)》 등 수많은 책을 저술했고 그의 혁신적인 사고는 정약용 등에게 이어져 더욱 계승·발전되었다.

경세치용의 학문을 열다

이익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로 평생 학문에만 몰두하면서 성리학뿐 아니라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모든 학문을 두루 섭렵한 인물이다. 유형원의 학문을 계승한 그는 당시 학자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았으며, 그의 사상은 문인과 제자 들에게 계승되어 성호학파라는 실학자 그룹을 형성할 만큼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정파 간의 대립이 치열할 뿐 아니라, 청나라를 통해 서양의 문물과 사상이 물밀듯 밀려들어와 지식인들이 세계관의 혼란을 겪을 때였다.

 

이익은 누구보다 독창성 있는 학문 연구로 실용 학문에 주력했으며 토지 제도의 개혁을 통해 자급자족적인 농업 사회를 꿈꾸었다. 그의 개혁 방안들은 획기적인 변혁을 도모하기보다는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한 것으로 현실에서 실제로 시행될 수 있도록 힘을 기울인 것이 대부분이다. 그는 마음속 깊이 평등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관직이 아닌 학문적 가치를 추구했다. 그의 실학 사상은 정약용(丁若鏞)을 비롯한 후대 실학자들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익은 아버지 이하진(李夏鎭)의 귀양지인 평안도 운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남인 계열로 많은 학자와 고관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증조할아버지 이상의(李尙毅)는 의정부 좌찬성을, 할아버지 이지안(李志安)은 사헌부 지평을, 아버지는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다. 그러나 그가 태어나기 바로 전 해인 1680년, 남인 정권이 무너지고 서인이 재집권하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나자 남인이던 아버지는 진주 목사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평안도로 유배되었다.

 

1682년 아버지가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난 뒤 어머니 권씨는 고향인 광주 첨성촌으로 이사해 전처가 남긴 3남 2녀와 자신의 2남 2녀를 모두 길렀다. 이익은 둘째 형 잠(潛)에게 글을 배웠는데 출세가도를 달리던 잠이 권력싸움에 휘말려 장살(杖殺, 때려죽이는 벌)되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삼각산에서 두문불출하며 독서에 전념했다. 이는 남인의 권력자였던 조상이 남겨준 토지와 재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게다가 집에는 아버지가 사신으로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구입한 서적도 많아 공부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이에 대해 그는 “세상의 백성들이 1년 내내 오로지 일만 하고도 좀처럼 먹고 살기 힘든데, 나는 조용히 앉아 편하게 살 수 있었다. 관직에도 나가지 못한 서생인 내가 일도 하지 않으면서 하인을 거느리고 양반답게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선조들이 물려준 재산 덕분이었다.”라고 쓰기도 했다.

 

또 한 가지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된 것은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재산을 형들에게 전부 넘겨주고는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소박하게 살았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그는 몰락 농민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성호문집》 권20에는 “우리의 가난이 날로 심하여 송곳을 꽂을 땅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라는 글귀가 있는데 이는 당시 농민들의 처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가 살았던 18세기 초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한 피해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조정은 동서 분당이 남인, 북인, 노론, 소론의 사색당쟁으로 분열되고, 다시 노론의 일당 독재가 굳어지는 추세 속에서 정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져 있었다. 국가 재정은 궁핍했고, 농민들은 광범위하게 몰락해 있었다.

 

그의 높은 학식에 대한 소문은 전국에 퍼져 결국 국가에서 종9품의 선공감 가감역에 제수했지만, 그는 이를 사양하고 일생 농민들과 똑같이 일하면서 살았다. 그리고 배움을 원하는 이들을 가르치며 틈틈이 정치, 경제, 음악, 지리 등 다양한 분야의 글을 썼다.

 

이익은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양의 여러 지식을 접했다. 서양의 과학 기술뿐만 아니라 세계지도와 지리에 관한 것, 천주교 교리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하게 공부했다. 에마누엘로 디아스(Emmanuelo Diaz)의 《천문략》을 통해 천문 지식을 습득했으며,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곤여만국전도〉,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의 《곤여도설》, P. S. 우르시스의 《간평의설》 등을 보고 식견을 넓혔다. 이를 통하여 그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과 문화관에서 탈피할 수 있게 되었으며, 주체적 역사의식이 결여된 사관의 잘못을 지적하며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을 정립하게 되었다. 삼한정통론은 우리나라 역사가 단군에서부터 시작되며 기자조선이 이를 계승했고, 이것이 다시 마한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내용이다.

그는 또 과학 서적을 통해 실증적이며 합리적인 사고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서양 과학 기술의 우수성은 인정했지만 천주교 교리에 관해서는 비판했다. 《천주실의발》에서 그는 “천주교를 받드는 것은 마치 유가에서 상제(上帝)를 받드는 것과 같고, 불교에서 석가를 섬기고 믿는 것과 같을 뿐이다.”라고 밝혔다. 성호는 서양 문화를 과학 기술과 천주교 신앙으로 구분해 인식하고 평가했으며 이에 대해 학문적 관점에서 논평하며 받아들인 것이었다.

 

이익은 당시 조선의 피폐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모든 제도를 개편해야 한다고 여겼다. 정치 기구를 간소화하여 제기능을 하도록 해야 하며, 무엇보다 과거 제도를 뜯어고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과거 시험 외에도 추천에 의해 인재를 등용하는 공거제(貢擧制)를 병행해 파벌에 좌우되지 않고 공정하게 인재를 선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유명무실해진 관청이나 관리직을 대폭 축소하고 대신 관원들의 녹봉을 높여 줌으로써 생활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지방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사라진다고 본 것이다. 또한 환관과 궁녀의 수를 줄여 임금이 앞서 절약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국가의 재정이 낭비되는 요소도 줄여야 한다고 보았다.

 

이와 함께 토지 제도의 전면 개편을 주장했다. 소수의 사람에게 토지가 집중되면서 발생하는 문제를 막기 위해서는 소규모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들의 몰락을 막아야 하는데 이는 가구당 필요한 최소 토지의 기준을 정해 그 이하의 토지를 매매하는 것을 막는 제도를 만들어야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사노비(私奴婢)의 수를 제한하고 그 수가 넘는 인원은 해방해 양민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글만 읽고 성인의 도리만을 말하면서,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는 방책에 대하여 연구하지 않는다면, 그 학문은 개인 생활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국가적 관계에서도 무용한 것”이라는 그의 말은 이익의 학문적 성격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이익은 83세가 되던 1763년, 연장자를 우대하는 우로예전(優老例典) 정책에 따라 첨지중추부사로 임명되었으나 그해 12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사상과 이념은 그 당시에는 전혀 실천되지 않았다. 그가 정치 현장에 나오지 않고 평생을 칩거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한 번도 실현시켜 보지 못하고 뜻만 간직한 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사상은 제자들에 의해 면면히 계승되었다. 《성호사설》은 그가 40여 년간 배우고 연구한 것을 집대성한 연구서로 후손들이 정리한 것을 안정복이 펴낸 것이다.  (다음백과)

안산식물원  현재 공사중이라 입장이 불가능.

김홍도(金弘道)
개설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단구(丹邱)·서호(西湖)·고면거사(高眠居士)·취화사(醉畫士)·첩취옹(輒醉翁). 만호를 지낸 진창(震昌)의 종손이자 석무(錫武)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김홍도는 당대의 감식가이며 문인화가인 강세황(姜世晃)의 천거로 도화서화원(圖畫署畫員)이 되었다. 강세황의 지도 아래 화격(畫格)을 높이는 동시에, 29세인 1773년에는 영조의 어진(御眞)과 왕세자(뒤의 정조)의 초상을 그렸다. 그리고 이듬해 감목관(監牧官)의 직책을 받아 사포서(司圃署)에서 근무하였다. 1781년(정조 5년)에는 정조의 어진 익선관본(翼善冠本)을 그릴 때 한종유(韓宗裕)·신한평(申漢枰) 등과 함께 동참화사(同參畫師)로 활약하였으며, 찰방(察訪)을 제수받았다.

 

이 무렵부터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를 따라 ‘단원’이라 자호하였다. 1788년에는 김응환(金應煥)과 함께 왕명으로 금강산 등 영동 일대를 기행하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 바쳤다. 그리고 1791년 정조의 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릴 때도 참여하였다. 그 공으로 충청도연풍 현감에 임명되어 1795년까지 봉직하였다. 현감 퇴임 후 만년에는 병고와 가난이 겹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여생을 마쳤다.

 

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기(壺山外記)』와 홍백화(洪白華)의 발문(김응환이 김홍도에게 그려준 시화첩 「금강전도」에 쓴 글)에 의하면, 그는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또한 도량이 넓고 성격이 활달해서 마치 신선과 같았다 한다. 그는 산수·도석 인물(道釋人物)·풍속·화조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당대부터 이름을 크게 떨쳤다.

작품세계

정조는 “회사(繪事)에 속하는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고 할 만큼 그를 총애했다. 그리고 강세황으로부터는 ‘근대 명수(近代名手)’ 또는 ‘우리나라 금세(今世)의 신필(神筆)’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편이며, 대체로 50세를 중심으로 전후 2기로 나누어지는 화풍상의 변화를 보인다.

 

산수화의 경우 50세 이전인 1778년 작인 「서원아집육곡병(西園雅集六曲屛)」(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말해 주듯이, 주로 화보(畫譜)에 의존한 중국적인 정형 산수(定型山水)에 세필로 다루어지는 북종 원체화적(北宗院體畫的) 경향을 나타내었다.

 

연풍 현감에서 해임된 50세 이후로는 한국적 정서가 어려 있는 실경을 소재로 하는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즐겨 그렸다. 그러면서 ‘단원법’이라 불리는 보다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 화풍을 이룩하였다.

 

물론 석법(石法)·수파묘(水波描) 등에서 정선(鄭敾)·심사정(沈師正)·이인상(李麟祥)·김응환의 영향이 다소 감지된다. 하지만 변형된 하엽준(荷葉皴: 산봉우리나 바위 주름의 형태를 연꽃 잎새의 줄기와 같은 모양으로 나타내는 방법)이라든지 녹각 모습의 수지법(樹枝法), 탁월한 공간 구성 그리고 수묵의 능숙한 처리, 강한 묵선(墨線)의 강조와 부드럽고도 조용한 담채(淡彩: 엷은 채색)의 밝고 투명한 화면 효과는 한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김홍도 특유의 화풍이다.

 

만년에 이르러 명승의 실경에서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 주변의 풍경을 사생하는 데로 관심이 바뀌었다. 이러한 사경(寫景) 산수 속에 풍속과 인물·영모 등을 가미하여 한국적 서정과 정취가 짙게 밴 일상사의 점경으로 승화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산수뿐만 아니라 도석인물화에서도 자신만의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였다.

 

전기에는 도석 인물 중 주로 신선도를 많이 다루었다. 굵고 힘차면서도 거친 느낌을 주는 의문(衣文: 옷자락 무늬), 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 그리고 티 없이 천진한 얼굴 모습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이 시기의 신선 묘사법은 1776년에 그린 「군선도병(群仙圖屛)」(삼성미술관 소장, 국보 제139호)에서 그 전형을 찾아볼 수 있다. 후기가 되면 화폭의 규모도 작아지고, 단아하면서도 분방하며 생략된 필치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도석인물화와 더불어 그를 회화사적으로 보다 돋보이게 한 것은 그가 후기에 많이 그렸던 풍속화이다.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의 점경이 간략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원형 구도 위에 풍부한 해학적 감정과 더불어 표현되고 있다. 그의 풍속화들은 정선이 이룩한 진경산수화의 전통과 더불어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가장 잘 대변해 준다.

 

그가 이룩한 한국적 감각의 이러한 화풍과 경향들은 그의 아들인 양기(良驥)를 비롯하여 신윤복(申潤福)·김득신(金得臣)·김석신(金碩臣)·이명기(李命基)·이재관(李在寬)·이수민(李壽民)·유운홍(劉運弘)·엄치욱(嚴致郁)·이한철(李漢喆)·유숙(劉淑) 등 조선 후기와 말기의 여러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등 한국화 발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앞서 설명한 작품 외에 그의 대표작으로는 『단원풍속화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527호)을 비롯해서 『금강사군첩(金剛四君帖)』(개인 소장)·「무이귀도도(武夷歸棹圖)」(간송미술관 소장)·「선인기려도(仙人騎驢圖)」·「단원도(檀園圖)」(개인 소장)와 「섭우도(涉牛圖)」·「기노세련계도(耆老世聯稧圖)」·『단원화첩』(삼성미술관 소장)·「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 등이 있다.   (다음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