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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국내여행

봉화여행2(억지춘양)(2021.12.17)

by 도화유수 2021. 12. 22.

만산고택
춘양시장

 

오늘이 이번 여행의 마지막 귀경길이다. 날씨가 주말에 급강하한다기에 조금 일찍 서둘러 청옥산자연휴양람을 나선다. 가까운 춘양으로 가서 만산고택등을 보고 서울로 가려고 한다.

춘양역(Chunyang station, 春陽驛)

춘양역은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에 위치한 영동선의 철도역이다. 동해역, 영주역, 부전역, 동대구역 등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가 1일 8~9회 다닌다. 이 역과 법전역 사이는 서울 지하철 1호선의 시청-종각 구간과 같이 선로의 곡선반경이 상당하여 열차의 속도를 감소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2017년 12월 15일 강릉선 KTX 운행 관련 다이어 개정으로 백두대간협곡열차가 추가로 정차하게 되었다.

한국어의 관용적 표현 중 하나로 ‘억지춘양’ 또는 ‘억지춘향’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유래는 여러 가지로 추측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춘양역과 관계가 있다. 본래 일제강점기 당시 영암선(영동선의 전신)을 부설할 때는 춘양을 통과하지 않기로 계획되어 있었으나 해방 후 그 계획이 자유당 집권 당시 비중 있던 정치인이었던 봉화군 출신 정문흠의 요구로 인해 갑자기 수정되어 춘양을 경유하도록 철로가 S자로 굽어져서 부설된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또는, 영동선 건설 당시 산고개를 뚫을 터널 기술이 부족한 관계로 마을을 통과하는 것이 불가피했기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새로 지어진 춘양역사가 단정하다.

 

봉화 만산고택(奉化 晩山古宅)

중요민속문화재 제 279호 만산고택

경북 봉화군 춘양면에 위치한 만산고택은 조선 말기 문신으로 통정대부와 중추원 의관, 도산서원장을 지낸 만산 강용(晩山 姜鎔 1846-1934) 선생이 지은 집으로 중요민속문화재 제279호로 지정되어 있다.

11칸의 긴 행랑채와 솟을대문을 지나 마당을 들어서면 정면에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는 사랑방과 대청마루, 조상의 신위를 모신 감실로 이뤄져 있다. 이 사랑채와 붙어 ‘ㅁ’자형으로 안채가 뒤로 배치되어 있는데,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과 상방, 부엌, 중방, 중방 남쪽으로 고방이 늘어서서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로 이뤄져 있다. 안채에는 토속 민간신앙을 반영하는 성주단지와 용단지가 모셔져 있는데, 지금까지도 이곳에서 성주제사가 치러지고 있다. 사랑채 오른쪽에는 이 집안 아이들이 공부하던 서실이, 왼쪽에는 담을 둘러 손님을 맞이하던 칠류헌이 있다.

만산고택에는 건물마다 현판이 걸려있다. 이 현판들은 각 건물에 담긴 뜻을 이해하고 음미하는 길라잡이가 된다. 사랑채의 처마 아래에는 ‘晩山’(만산)과, ‘靖窩’(정와), ‘存養齋’(존양재)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다. ‘만산’은 흥선대원군이, ‘정와’는 강벽원 선생이, ‘존양재’는 3.1운동의 33인 중 한 명이 오세창 선생이 쓴 것이다. 서실에 걸린 ‘문필과의 밝고 깨끗한 인연’이라는 의미의 ‘翰墨淸緣’(한문청연)은 영친왕이 8세 때 쓴 글씨이다. 칠류헌에 걸려 있는 오세창 선생이 쓴 ‘七柳軒’(칠류헌)이라는 현판에서는 요일이 순환한 듯 언젠가는 국운이 회복될 것을 염원했던 강용 선생의 국운회복의 열망을 읽을 수 있다. 이밖에도 ‘白石山房’(백석산방) ‘四勿齋’(사물재) 등의 현판이 있다.

 

“살아 있는, 진짜 고택”

만산고택은 지어진 이래 13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후손들이 살지 않은 적이 없었다. 급격한 근대화를 거치며 고택의 후손들이 도시로 떠날 때에도 이 집의 후손은 이곳에서 가정을 꾸리고 집을 지켜왔다. 그러는 동안 보일러와 수세식 화장실이 들어오기도 했다. 가을이면 곶감이, 겨울이면 시래기가 내걸리기도 하고, 장독대에서는 주인이 직접 담근 김치, 간장, 된장, 고추장이 익어가고, 손자들의 장난감이 마당 모퉁이에서 비를 맞기도 한다. 이처럼 만산고택에서는 과거가 현재에 맞게 고쳐지기도 하고,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현재와 만나기도 한다. 만산고택은 ‘보여주기 위한’ 과거의 집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함께 어우러져 지금을 살아가는 집이다.

나무 결결에 켜켜이 배여 있을 사람들의 흔적을, 내가 지금 만지는 마룻장에서 첫걸음을 디뎠을 아이의 일생을 상상하는 것도 큰 즐거움이 될 것이다. 이런 중층적인 시간 체험이 가능한 곳이 바로 만산고택이다.

 

“야생화와 도자기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집”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이 사랑채 앞에 쭉 놓여 있는 야생화 화분들이다. 춘양면 인근 산에서 주로 자생하는 야생화를 안주인이 직접 가꾼 것으로 고색창연한 분위기에 은은한 색채를 더해 집의 아름다움을 한껏 올려준다. 사랑채 대청과 칠류헌 대청에는 안주인이 직접 빚은 도자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봉제사접빈객’을 의무로 여기며 살던 안주인이 뒤늦게 도자기에 입문한 후, 온 열정을 다해 빚은 것이다. 인자한 인상의 안주인의 구수한 이야기를 들으며 도자기와 야생화를 감상하는 것도 큰 재미다.

 

“이야기가 있는 집”

엄혹했던 일제강점기, 거지 분장을 한 군자금 모금책이 드나들던 뒤안, 현재의 주인이 한문을 배우던 서실, 도시에서 시집온 안주인이 달을 보면 울던 뒤안문. 문짝 하나에도 이야기가 살아서 이어져오는 집. 집 곳곳에 가득한 솔향기와 풀벌레, 소쩍새 소리가 어우러진 곳에 집과 관련된 옛이야기를 듣는 것도 아련한 추억이 될 것이다.

 

만산고택의 홈페이지에 고택소개 및 숙박정보 등이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여기에 춘양에 대한 자세한 소개가 된 신문기사를 소개한다.

[낙동·백두를 가다] 봉화 하면? '춘양목과 억지춘양'

                              매일신문 입력 2009-01-09 06:00:00

봉화 하면 떠오르는 것은? '춘양목(금강송)'과 '억지춘양'이다.

사학자이자 춘양면의 만산고택 주인인 강백기씨는 '억지춘양'에 대해 두 가지 설을 내놓았다. 해방 전 영주에서 강원도 철암까지 철도 개설공사 계획이 춘양을 거치지 않도록 설계돼 있었는데, 자유당 때 권력 실세였던 봉화 출신의 모 정치인이 '억지로 춘양을 거치도록' 계획을 변경시켜 '억지춘양'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지금은 이 철도가 춘양 발전을 저해하는 걸림돌이라고 했다.

또 궁궐자재나 왕실의 장례용 관을 짜는데 쓰인 춘양목이 너무 인기가 있자 당시 전국의 세도가들이 억지로 춘양목을 가져가 집 등을 짓는데 썼다고 해 '억지춘양'이라는 말도 나왔다고.

춘양목은 그 유명세만큼이나 슬픔도 있다. 고선계곡에서 만난 안세기(83)씨는 70년째 고선계곡에 살고 있다. 안씨는 평생 춘양목의 아픔을 경험한 산증인이다. 안씨는 일제 때 고선계곡에는 총칼을 든 일본 경찰과 인부들밖에 없었고, 밤낮으로 아름드리 춘양목을 벌목해 실어 날랐다고 했다. 당시 계곡에는 일본 주재소가 있었고, 주재소 인부만 300명에 달했다고 한다.

벌목 기간만 무려 17년으로 당시 계곡의 춘양목이 얼마나 울창했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주재소는 벌목한 춘양목을 차에 실어 열차로 부산으로 옮겼다고 한다. 벌목한 춘양목 중에는 직경이 무려 2m나 되는 나무들이 즐비했다고 기억했다. 안 씨는 "장정 6명이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밥을 먹을 정도"라고 말하니 그 크기를 짐작하고도 남겠다.       이종규기자

 

이어서 1979년 나의 첫 발령지 인 안동 도산중학교(경북의 북부 봉화 인접지역) 시절 들은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 당시까지도 춘양이 우리나라의 오지이지만 춘양이 얼마나 번성했는지를 알려준다.
<춘양인근에 사는 아버지가 서울에 다녀왔다. 꼬마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 서울이 춘양만 합니까?"라고 물을 정도로 춘양은 오지에서 빤빤한 곳이라고 했다>
지금 춘양시장에 들어가니 시골 장터치고는 대단히 큰 편인데 조금 쓸렁한 기분이 든다. 코로나 탓만은 아니리라.

이어서 중앙고속도로-원주광주고속도로를 통행 서울로 귀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