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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원과 동작구

서울현충원 외국인 묘역(2021.08.28)

by 도화유수 2021. 8. 29.

애국지사묘역에서 바라본 서울현충원
스코필드묘비 : 내가 죽거든 한국땅에 묻어주시오. ....(유언)
장후이린(강혜림) 유공자의 묘비 : '의백장존(義魄長存, 의로운 넋은 오래도록 남는다)'
魏緖舫(웨이시팡)의 묘비

국립서울현충원 외국인 묘역

외국인 묘역 조성 계획에 따라 장후이린(강혜림) 유공자의 묘소를 24번 묘역에서 12번 묘역 앞줄로 이전한 2012년 5월 15일부터 외국인 묘역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 묘역에는 화교인 장후이린(강혜림)과 웨이쉬팡(위서방) 두 분이 모셔져 있다.

 

또한 캐나다 사람으로 일제강점기에 3·1독립만세를 지원하고 제암리 교회 방화사건을 촬영하여 국내외에 일제의 잔악상을 알리는 등의 활동을 한 프랭크 W.스코필드(석호필) 박사가 독립유공자 묘역 96호에 모셔져 있다.

 

장후이린(강혜림)은 1950년 1사단 15연대에 입대하여 적진정찰 및 포로심문 등의 임무수행 중 1951년 경기 과천에서 전사하였고, 웨이쉬팡(위서방)은 1950년 10월 1사단 수색대에 입대하여 적진정찰 및 중공군 포로심문 활동의 공로가 있으며, 휴전 후 한의사로서 극빈환자 무료 진료, 장학사업 등 사회공헌에 기여하다 1989년 사망하였다.

이 두 분의 공적을 널리 알리고 후대에 길이 계승하고자 2012년 5월 15일 장후이린(강혜림)의 묘를 웨이쉬팡(위서방)의 묘 옆으로 모셔 외국인 묘역으로 조성하였다. <서울국립현충원 홈페이지에서 퍼옴>

 

수충교(輸忠橋)

호국영령들이 국가존망의 위기에 생명을 바쳐 충성을 다 하였다는 뜻으로 3대 함태영부통령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김부식의 공신호(功臣號)에서 연유하여 이름지었고 1956년 4월 10일 건설되었다.

 

충성거북상

 

산딸나무가 열매를 맺었다.

 

8월의 막바지에 배롱나무가 여름의 꽃임을 아직도 보여주고 있다.

 

드디어 12묘역이 나타났다.

姜惠霖(장후이린)

장후이린(강혜림)은 중국 화교로서 평양에 거주하여 오던 중 1950년 11월 중공군이 6·25전쟁에 개입하자 자진하여 우리 육군 1사단 15연대에 종군, 적정 수색과 포로 심문 등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1951. 2. 2. 경기도 과천지구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 분의 유해는 동지들에 의해 부산 화교 소학교에 임시 안치되어 있었는데 자유중국 대사관과 전우 화교들로부터 군묘지에 안장하여 줄 것을 요청받고 정부에서는 1964. 11. 13. 제110회 국무회의에서 국립묘지에 안장할 것을 의결, 1964. 12. 12. 제24묘역에 안장하였다. 그 후, 외국인으로써 6·25전쟁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운 유공자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널리 홍보하기 위해 2012 .5. 15. 12번 묘역으로 묘소를 이전하고 웨이쉬팡(위서방)과 함께 별도로 묘소 조성하게 되었다.

이 분은 생전의 공적으로 1959. 6. 1. 은성 화랑 무공훈장을 추서 받았으며 화교의 사기와 우방국과의 유대 강화를 위하여 우리 전몰 용사와 같은 대우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게 된 것이다.<서울국립현충원 홈페이지에서 퍼옴>

 

魏緖舫(웨이시팡)

웨이쉬팡(위서방)은 신의주에 거주하는 화교로서 1945년 중국 안동성 경찰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하여 자유중국군 대위로 임관, 근무하던 중 1949년 국공내전에서 자유중국이 본토를 철수하여 대만으로 퇴각할 때 신의주에 귀향, 평양 근처 장산탄광 광부로 취업 후 한·중애국청년단을 조직하여 활약하였다. 1950. 10. 국군 평양 진격시에는 보병 1사단 수색대에 편입, 적정수색과 첩보활동을 하고 중공군 포로심문 등을 실시한 공로로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휴전 후에는 한의사로서 극빈환자 무료진료, 장학사업 등 국가 사회발전에 기여하다 ’89. 6. 25. 운명하였으며, ’89. 12.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90. 3. 20. 에 안장하였다. <서울국립현충원 홈페이지에서 퍼옴>

 

프랭크 W 스코필드 박사

스코필드(한국명 석호필)는 영국 태생으로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에서 세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교에서 강의하던 중 1916년 11월 캐나다장로회 선교사 자격으로 부인과 함께 내한하여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을 가르쳤다.

1919년 3월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한국인들을 적극적으로 돕고 기록으로 남기며, 일제의 비인도적 한국인 탄압에 맞서 싸웠다. 특히, 일제가 자행한 화성 제암리교회 학살 방화 현장과 수촌리를 방문하여 사진을 찍어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다.

스코필드는 같은 해 5월 직접 서대문형무소를 찾아가 당시 수감되었던 유관순 등을 면회한 후 총독부 고위 당국자에게 고문과 비인도적 만행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였으며, 한국의 상황에 대해 각국 언론에 동정과 지지를 호소하였다. <서울국립현충원 홈페이지에서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