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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원과 동작구

박정희대통령 묘소(2021.09.02)

by 도화유수 2021. 9. 7.

박정희대통령 묘소

 

9월 2일(목)오후 좋은 날씨에 오후시간이 있어 국립서울현충원을 찾는다. 오늘은 대통령묘역을 집중적으로 돌아볼 예정이다.

 

 

사당통문을 넘어가는 데 벌써 밤이 굴어져 간다. 추석이  20일 정도 후에 있으니 추석엔 밤이 익어 벌어질려나. 장군묘역을 지나려니 이게 무었이냐? 정말 밤처럼 생겼다.

 

가시칠엽수[ marronnier ] 마로니에

요약] 쌍떡잎식물 이판화군 무환자나무목 무환자나무과의 낙엽교목.

서양칠엽수라고도 한다. 높이 30m, 지름 1~2m이다. 잎은 마주나고 손바닥 모양의 겹잎이며 길이 15~20cm의 긴 잎자루가 있다. 작은잎은 5~7조각으로 잎자루가 없고 쐐기꼴의 거꾸로 세운 달걀 모양이며 끝이 뾰족하고 가장자리에 둔한 톱니가 있다.

꽃은 5~6월에 피고 길이 20~30cm 되는 대형 원추꽃차례가 나오며, 1개의 꽃대에 100~300개의 꽃이 핀다. 꽃잎은 4~5개이고 흰색이며 기부에 황색 또는 분홍색 반점이 있고, 드물게 황적색인 것도 있다. 열매는 8월에 맺으며 공 모양으로 겉에 가시가 있다. 종자는 보통 1개, 때로는 2~3개 있으며, 독이 있어 식용할 수 없다.

원산지는 유럽 남부이며 세계 4대 가로수종의 하나이고, 수형이 웅장하고 잎이 좋아 가로수 ·공원수 ·장식수 ·녹음수로서 세계 각지에서 식재되고 있다. 증식은 실생(實生) ·접목 ·근삽(根揷) 등에 의한다. 프랑스의 마로니에 공원으로 유명해진 나무이다. 한국에서는 서울 동숭동의 전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정에 있는 마로니에가 유명하다.

유럽에서는 옛날부터 이 나무의 종자를 치질 ·자궁출혈 등의 치료약으로 사용해 왔다. 최근에는 응용 범위가 더욱 넓어져서 동맥경화증 ·혈전성 정맥염, 외상에 의한 종창(腫脹) 등의 치료와 예방에 사용되고 있다. 사포닌의 에스신, 플라보놀의 켈세틴, 켄페롤 및 타닌을 함유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시칠엽수 [marronnier] (두산백과)

그래서 먼저 장군묘역을 올라본다.

박정희 대통령 묘소

박정희 대통령 묘역의 면적은 3,636m²로,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새마을운동을 통해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빛나는 도약을 이루어 냈다. 또 국방과학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자주 국방을 위해 노력하였다.

박정의 대통령 묘역은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서거하여 국민장을 치르고 국립서울현충원에 먼저 안장되면서 조성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10월 26일 서울에서 서거, 11월 3일 국장으로 치른 후 안장되었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

1925년 11월 29일 충북 옥천에서 출생한 육영수 여사는 영부인이 된 후 각종 사회사업과 육영사업에 앞장섰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 중 북한의 사주를 받은 괴한의 저격으로 서거하여 8월 19일 국민장으로 이 곳에 안장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묘비

내외분묘비 전면 : 박정희대통령 육영수 영부인 묘

               후면 :
대한민국 박정희 대통령은 본관이 고령이며, 직강공의 26세손이신 박성빈공과 수원 백남의 여사의 네째 아드님으로 1917. 11. 14.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에서 태어나시어 1945년 건군과 함께 입대 19615.16혁명을 주도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이 되시고 1963년 육군대장으로 예편, 1963년 제5대로부터 1978년 제9대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을 역임하시는 동안 조국 근대화의 기수로서 오천년 이래의 가난을 물리치시고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의 터전을 닦으시어 세계속의 풍요한 한국으로 부각시키셨으며, 겨레의 염원인 평화적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시는 등 민족중흥을 이룩하신 영도자로서 민족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시고 1979. 10. 26. 서울에서 향년 61로 서거, 삼천칠백만 온 국민의 애도 속에 113일 국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시다.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는 관성 육종관공과 경주 이경령 여사의 둘째 따님으로 1925년 11월 29일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나시어 1950년12월 대구에서 혼례를 올리셨으며 1974. 8. 15. 서울에서 향년 49로 순국, 8월 19일 국민장으로 박정희 대통령묘 왼편에 쌍분으로 안장되시다.

1980년 2월 2일 온 국민의 뜻을 모아 세우다.

 

 

 

 

 

박정희(朴正熙)대통령

한국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대한민국 제5~9대 대통령이다.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뒤 1963년 5대 대통령이 되었고, 장기집권을 위한 3선 개헌을 통해 1979년까지 재임하였다. 그러다 1979년 10월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의 저격으로 사망하였다.

출생 – 사망 : 1917. 11. 14~1979. 10. 26

 

1917년 경상북도 구미 선산(善山)에서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했다. 3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일본인 시학관과의 마찰로 사직했다. 이후 만주의 신경(新京: 지금의 장춘(長春))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수료하고 194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여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그리고 1945년 8·15 광복 이전까지 주로 관동군에 배속되어 중위로 복무하였다. 이러한 이력으로 인한 친일 행적은 아직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광복 이후 귀국하여 국군 창설에 참여했으며,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제2기로 졸업하고 대위로 임관하였다. 광복 직후 남로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49년 좌익계열의 군인들이 일으킨 여수·순천사건을 계기로 군법회의에 회부된 뒤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만주군 선배들의 구명운동과 군부 내 남로당원 명단을 알려준 대가로 실형을 면하고 강제 예편되었다. 이후 육군본부에서 무급 문관으로 근무하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소령으로 복귀하여 1953년 준장이 되었다. 이후 제2군단 포병 사령관, 제5사단 사단장, 제6군단 부군단장과 제7사단 사단장을 거쳐 1958년 3월 소장으로 진급한 뒤 제1군 참모장으로 임명되었으며, 6관구 사령관이 되었다. 1960년에는 군수기지 사령관, 제1관구 사령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차례로 역임한 후 제2군 부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

 

1961년 5월 16일 제2군 부사령관으로 재임 중에 5·16 군사쿠데타를 주도하였고, 7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어 2년 7개월간의 군정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1962년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하자 대통령권한대행을 맡았다. 그는 '재건국민운동본부'를 설치하여 가족계획, 문맹퇴치화 운동을 벌이는 등 국토 및 경제 개발 계획에 착수하였다. 이는 다수의 국민들로부터 호응을 얻었으나 군정기간 중앙정보부에 의해 '4대 의혹 사건' 등이 일어나는 등 어두운 면도 많았다.

 

1963년 육군대장으로 예편하여 민주공화당에 입당해 총재에 추대되었고, 그해 12월 제5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취임사에서 경제성장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표명하였는데, 이후 여론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협정에 정식 조인하고 베트남 전쟁 파병을 단행하며 외자를 모은다. 이로 인해 매국과 총알받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인프라 건설을 통하여 차후 경제성장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박정희는 1967년 재선된 후 장기집권을 위하여 1969년 3선개헌을 통과시키게 된다. 그리고 1972년 국회 및 정당 해산을 발표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유신정권인 제4공화국이 출범하게 된다.

 

유신 초기 '근면, 자조, 협동'의 기치를 내세운 전 국민적 새마을운동을 전개하는데, 이는 관 주도로 펼쳐진 운동인 탓에 부작용도 있었으나 절대 빈곤을 해소하는 데는 기여를 했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점점 커져가는 장기집권에 대한 불만, 빈부 격차, 국민들의 민주화운동으로 지지도가 하락하자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정권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거센 저항에 부딪히자 이에 대한 관심을 북한으로 돌리기 위해 '자주ㆍ평화ㆍ민족대단결'을 민족통일의 3대원칙으로 규정한 1972년 7·4남북공동성명과 1973년 6·23선언이라 불리는 '평화통일외교정책(할슈타인원칙의 폐기)'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실제 정책면에서는 북한의 비협조와 당시의 국제정세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74년 8월에는 영부인 육영수가 조총련계 문세광에게 저격당하는 등 본격적인 국민적 저항이 일어났다. 그리고 1979년 '부마민주항쟁(釜馬民主抗爭)'이 일어나고 그해 10월 26일 만찬석상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에게 피격 당하면서 급서(急逝)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정희 (시사상식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