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창공원 내 삼의사 묘역>
초대의 문자를 보고 참가신청을 했는데 답신이 왔다. 한 번은 꼭 참석하고 싶었다.
6호선 효창공원앞 역 1번출구에서
정문인 창렬문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남아가 집안을 나서면 다시는 살아서 고향에 돌아오지 않는다.” 는 글
행사장에서 낭독할 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윤봉길의사의 모든 행동 하나 하나가 가슴 뭉클한 만세의 영웅이다.
효창동과 효창공원
효창동은 조선시대 왕실의 묘역인 ‘효창원’이 있던 곳이다. 효창원은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 등이 묻힌 묘역으로, ‘효창묘’, 또는 ‘애기능’으로 칭하다가 고종 7년에 효창원으로 승격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강제이장되었다.
조선시대의 효창원은 청파동1가에 마포구 공덕오거리 부근에 이르는 넓은 지역으로 숲이 우거져 경치가 아름다웠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 부근에서 말을 타고 지나갈 수 없도록 하마비가 효창동 6번지 49호에 있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이곳 마을 이름이 ‘하마비계’로 불린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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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22권, 정조 10년 윤7월 19일 경인 1번째기사
葬文孝世子于孝昌墓。 是曉發靷, 上出弘化門外哭送
문효 세자(文孝世子)를 효창묘(孝昌墓)에다 장사지냈다. 이날 새벽에 발인을 하였는데, 임금이 홍화문(弘化門) 밖에 나와서 곡하고 전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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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시립공원. 지리적으로는 효창동 외에도 청파2가동, 마포구 공덕동과 신공덕동까지 영역이 있으며 일반적 공원과는 달리 호국보훈 관련 시설 및 유적지들이 있어 호국적, 역사적인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원래는 조선왕조 22대 임금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의 묘가 있는 자리라 하여 '효창원(孝昌園)'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효창원과 100보 정도 가까운 위치에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의 묘소인 의빈묘가 함께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경기도 경성부(지금의 서울특별시)가 효창원 일부를 공원으로 조성하였고, 1944년 효창원이 경기도 고양으로 이장되면서 이름만이 남았다. 해방 후인 1946년 박열, 이강훈 등 아나키스트계 독립 운동가들이 3의사의 유골 수습을 촉구하여 '3의사국민장봉장위원회'를 발족하고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지금의 중국 상하이 루쉰공원)에서 당시 일본왕 히로히토의 생일 행사 때 물통폭탄을 투척한 매헌 윤봉길 의사(義士)와 일본 도쿄에서 일왕 히로히토를 폭사(爆死)시키려다가 미수에 그쳐 일본군에 의해 사형당했던 이봉창 의사, 중국 상하이에서 당시 주중(駐中) 일본 대사를 저격하려 했다가 실패하여 옥사(獄死)했던 구파 백정기 의사(義士)의 유해가 국내에 공식 운구되어 삼의사묘(三義士墓)에 안장되기도 했다.
실제 삼의사묘에 가보면 유골이 없는 가묘(假墓)가 있는데 그 묘소에는 1909년 중국 하얼빈 기차역에서 일본의 정치가이자 한국 침략의 원흉으로 불리웠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유골이 안장될 묘소라고 한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되기 전 유언에서 "내가 죽으면 내 유골을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대한의 독립이 되거든 조국으로 나의 유골을 운구해달라" 라고 남겼지만 한 세기가 지나고 해방이 된 지 7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안중근 의사의 시신은 커녕 유골의 행방도 찾지 못하고 있다.
의열사
차리석
조성환 김구
이동녕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백범 기념관
김구선생 묘
이봉창의사 동상
임정요인 묘역
뒷편이 숙명여자대학교이다.
원효대사동상
주최측에서 준 식권으로 점심을 먹고 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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