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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고 순례길2 용서의 언덕(2023.04.04)

by 도화유수 2023. 5. 6.

용서의 언덕에서

원래 산티아고 순례길의 나의 목표는 2달이었다. 비싼 항공료내고 왔으니 33일 정도 프랑스길 걷고 스페인 포르투갈 자유여행즐기고 이탈리아 돌로미티를 걷고 돌아오는 계획이다. 내인생에 더 이상 여행도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후에는 할 수있다면 서울근교에 조그만 농막에서 국화 장미등 원예를 가꾸는 것이 나의 이상향이다. 세상이 자신의 마음데로 된다면 ... 자신의 계획에 50%만 이루어져도 내생각엔 대만족이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로 모든 것이 엉퉁하게 꼬여가고 이러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나 걱정이 되어 작년 12월 가족모임에서 나혼자 산티아고 길을 가겠다고 선언했더니 가족들의 놀람속에 딸이 같이 동참하려고 했고 우리집의 주장인 나의 운명, 나의 달링께서 허락을 해주어서 갑자기 일정을 축소하고 딸아이의 일정을 수용하여 비행기표를 구입함으로 일정이 꾸려졌다. 이 계획은 바쁜 딸아이의 의견은 받아들었지만 그동안 몇 년간 연구한 나의 계획임을 밝혀둔다.
<몇 번의 수정으로 최종적으로 계획한 순례길 계획이다>

드디어 감격의 첫 순례길 여정이 시작된다.
Albergue Casa Ibarrola
숙소에서 06:30에 일어나 간단히 씻고 숙소를 출발한다. 약간의 어둠이 깃든 도시의 골목길에서 시작된다.

알베르게 까사 이바롤라 아래층 사워장옆 건조대
알베르게 까사 이바롤라 입구 리셉션

어제 보아둔 길로 나서지만 도시의 길을 찾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조가비를 따라 갔지만 잘 못 길을 들어 억지로 깐 Camino Ninja앱이 많은 도움을 준다. 그리고 자전거을 타고 가는 팜플로나 시민들도 정말 친절하게 가려켜준다. 까미노의 도시 답다. 

 

오늘(4월 4일(화))의 일정 : 팜플로나 ----->  푸엔떼 라 레이나  (25km)   07시~13시30분 

 

팜플로나 (나바라)Pamplona

1. 개요

중세 스페인에 있었던 나바라 왕국의 수도. 스페인 북부 나바라 지방의 주도인 도시다. 중세 스페인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성벽과 성당 등 당시 문화 유산이 잘 남아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을 이끈다. 또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의 성지 순례객이라면 엘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노상에 있으므로 한번쯤 들러볼 만하다. 현재 인구는 196,000명이다.

축구팬이라면 CA 오사수나의 연고도시로도 잘 알려져 있다.

2. 역사

도시의 이름은 로마 공화정 말기의 명장인 폼페이우스에서 유래했다. 그가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의 군대와 싸울 때에 숙영지로 쓴 것이 도시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로마 시대에는 폼페이오폴리스(Pompeiopolis)로 불렸고, 나중에 폼파일로(Pompaelo)에서 다시 팜플로냐로 바뀌었다. 고대 후반부터 도시에는 바스크인들이 하산해 정착한 듯하다. 그들이 팜플로나를 부른 '이루냐'는 그들 언어로 '도시'라는 뜻이다.

466년, 472년에 도시는 서고트 왕국의 한 귀족에게 정복되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사실상 독립을 유지한 듯 보인다. 581년 서고트 국왕 [[리우비길드]의 군대는 바스크인들을 굴복시켰고 이 시기에 성 페르미노 주교가 비기독교도이던 40,000명의 바스크인들을 3일만에 세례를 주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8세기 초에 서고트 왕국이 내분으로 혼란에 빠지자 팜플로나의 바스크 인들은 재차 독립했다. 711년 로데릭 왕은 도시를 공격했는데 동시에 타리크의 이슬람 군대가 지브롤터에 상륙했다.

2.1. 아랍인의 지배

서고트 군대는 713년 이후로 사실상 소멸했고 아랍-베르베르 군대는 715년에 팜플로나에 무혈 입성했다. 바스크 인들은 지즈야를 내며 이슬람의 지배 하에 별다른 저항 없이 고분고분 지냈다. 그리고 팜플로나는 무슬림 군대의 아키텐 원정의 기지로 활용되었다. 740년 팜플로나는 코르도바 총독의 직접 지배령이 되었고 755년에는 피레네 산맥의 바스크인들을 공격한 아랍 군대가 패배하기도 했다.

2.2. 프랑크 vs 바스크

778년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가 이베리아 원정을 해 도시에 접근하자 무슬림 영주[2]는 항복했지만 도시는 파괴되고 말았다. 이후 프랑크 인들은 론세스바예스 전투에서 바스크인들에게 패한다. 781년 아브드 알 라흐만은 팜플로나를 후우마이야 왕조의 영토로 편입했다. 799년에는 아랍인들이 바스크인들과 코르도바 중앙정부에 반란을 일으켰지만 라흐만의 아들인 히샴 1세에게 진압되었다. 하지만 806년 팜플로나는 다시 프랑크 제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다만 812년 루트비히(이후 경건왕으로 즉위)의 실패한 원정 이후 바스크인들은 독립했다.

2.3. 팜플로나 왕국의 수도

프랑크인들은 824년에 바스크로 원정대를 보냈지만 2차 론세스바예스 전투에서 바스크-아랍(카시 부족)의 연합군에게 격퇴되었다. 그리고 그 지도자이던 에네코 아리스타가 왕으로 추대되어 나바라 왕국의 전신이자 바스크 민족의 첫 독립국인 팜플로나 왕국이 세워졌다. 아리스타의 어머니는 카시 아랍인과 재혼해 바스크인과 카시 부족은 종교에 상관 없이 서로 잘 지낸 듯하다. 하지만 이 시기의 팜플로나는 요새 마을에 불과했다. 924년에 한 코르도바인은 팜플로나를 '그다지 자연의 축복을 받지 못한 곳'이라고 묘사했다.

게다가 924년 7월 24일에 아브드 알 라흐만 3세의 후우마이야 왕조의 군대가 도시를 습격, 약탈한 후 돌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10세기 말에는 바이킹의 침공까지 받았다. 이 도시가 번성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11세기부터다. 스페인 서북쪽 갈리시아 지방의 성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으로 가는 순례길(엘 카미노 데 산티아고)을 1083년에 열었는데 그 여정에 팜플로나가 위치한 것이다. 피레네 이북의 기독교도들이 몰려들며 도시는 발전했다.

하지만 도시가 커지면서 각 3개의 구역마다 분쟁이 발생했고 1258년과 1276년에는 유혈 사태로 번지기도 했다. 1423년에 카를로스 3세는 세 구역을 하나로 합쳐서 분쟁을 끝냈다. 그리고 1512년에 스페인 군대가 팜플로나를 함락해 스페인의 도시가 되었다.

3. 관광

산 페르민 축제(매년 7월 6일 ~ 14일) 때에 '엔시에로(encierro)'라고 하는 소 떼를 풀어놓는 행사로 유명하다.

도시 성벽도 유명하다. 프랑스 국경지대하고도 가깝고 16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카스티야에게 정복당하지 않았던 독자적이었던 동네라 아빌라, 세고비아, 레온 같은데서 볼수 있는 뻣뻣한 중세 초기의 성벽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최근, 근세까지 실전성이 있었던 성형 포병 요새로 되어있는게 특징이다.

플라사 델 카스티요또는 카페 이루냐에, 팜플로나 시청또는 산사투르니노 교회에 들러보세요.

모누멘토 알 엔시에로 이 포함 야외 예술 과 동상 또는 조각상

세군도 엔산체의 독특한 매력으로는 사적지 및 바 등이 있습니다. 이곳을 여행할 계획이라면 모누멘토 알 엔시에로 또는 토로스 데 팜플로나 광장에 들러보세요.

밀라그로사에서 느끼는 매력은 축제이고, 꼭 가봐야 할 명소는 나바라 아레나입니다.

카페 및 사적지 등이 로차페아의 가장 큰 매력이에요. Monasterio viejo de San Pedr

 

우리는 시간이 없어 거의 지나친 팜플로나. 블로그에 올리면서 인터넷에서 찾아 공부를 해본다.

나바라 대학 표지판
시루르 메르노
벌써 멀리 베르돈 고개(용서의 고개)가 보인다.
사라끼에기
성당옆 벤취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스페인의 모든 수도는 음료가능

티엔다(상점)에서 쉬면서 스페인어 실력도 점검해 본다 "¿Dónde está el baño?"화장실이 어디에요?, "¿cuánto cuesta?"얼마입니까? 하면서 2층 화장실도 다녀오고, 산티아고 순례길 조가비도 샀다.

티엔다(상점)
산티아고 순례길 조가비도 달았으니 정말 순례자가 되었다.
레니에가 샘
뻬르돈 고개(용서의 고개)
우떼르가
무루사발
오바노스
오바노스

이곳을 지나야 뿌엔떼 라 레이나이다.

유명한 축제때 오바노스의 신비를 공연하는 성문
오바노스 마을을 나와 약 30분을 걸으면 마을 입구의 순례자를 형상화한 철제 조각상을 볼 수 있다.

 

뿌엔떼 라 레이나 Puente la Reina
Albergue de los Padres Reparadores

Albergue de los Padres Reparadores 공립알베 인당 7유로

뿌엔떼 라 레이나(여왕의 다리)는 나바라에서 까미노의 상징적인 도시 중의 하나로 마을의 입구부터 출구까지 직선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산띠아고 가는 길인 전형적인 까미노 마을이다. 나바라와 아라곤의 왕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 마을에는 중세에 만들어진 전형적인 사각형의 건축물들을 볼 수 있고 7개의 아치로 만들어진 마네스크 양식의 아름다운 중세의 다리를 감상할 수 있다. 다리 아래를 흐르는 아르가 강은 까미노에서 가장 아름답고 상징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다리는 내일 새벽에 깜깜할 때 지나갈 예정.

성당을 구경하고 민생고해결을 위해 식당을 찾았으나 자리가 없어 땡볓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의 메뉴(Menu del Dia)를 시키는데 처음이라 애를 먹고 시켰다. 하여튼 배터지게 먹고 36.6유로. 오늘의 메뉴는 괞찮다.

 

그리고 이 때 학습으로 먼저 음료를 주문하고,  Ensaladilla rusa와 Ensalada mixta 를 주문하고, 주메뉴를 주문하면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커피(Cafe)는 시키면 추가로 음식값에 들어간다.  이런 학습이 이후 음식주문에 달인이 되게 했다.

Ensaladilla rusa
Ensalada mixta
수뻬르메르카도 디아에서 내일 필요한 물 점심간식등을 구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