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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원과 동작구

김영삼대통령 묘소(2021.09.02)

by 도화유수 2021. 9. 11.

국립서울현충원 김영삼대통령 묘소

 

 

 

 

김영삼 대통령 묘소

김영삼 대통령 묘역의 면적은 480m²로, 평생을 조국의 민주화에 몸 바친 김영삼 대통령은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최초의 문민정부를 출범시켰으며, 공직자 재산 공개법, 금융실명제 등 강력한 개혁 정책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정치·경제 민주화를 실현하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2015년 11월 22일 서울에서 서거하였으며, 국가장으로 11월 26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김영삼(金泳三)대통령

대한민국 전 대통령(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 이후 자신의 정부를 최초의 '문민정부'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그는 하나회 척결,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수수 폭로 및 구속, 조선총독부 철거, 금융실명제 실시 등 핵심적인 개혁을 통해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정권 말기 대기업들의 연쇄적 부도 사태와 차남 김현철의 국정 개입 등으로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고, 무엇보다 IMF 구제금융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엄청난 국민적 비판 속에서 임기를 마감했다.

출생 – 사망 : 1927. 12. 20 ~ 2015. 11. 22

 

1927년 12월 20일 경남 거제에서 태어나 1947년 경남고등학교, 1952년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51년 장택상 전 국무총리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했으며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최연소(만 26세) 의원으로 당선됐다. 이후 제5·6·7·8·9·10·13·14대까지 최다선인 9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는 의정 활동을 시작하면서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고 이후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다. 야당 당수만 세 차례 지내며 의원직 제명과 가택연금 등 정치적 박해에 굴하지 않고 박정희ㆍ전두환 군사정권에 맞섰다. 특히 박 정권이 3선 개헌을 강행하던 1969년에는 박 전 대통령의 장기집권에 대한 비판을 가하던 중 괴한들에게 초산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1972년 10월 유신으로 박정희 1인 장기독재 체제가 들어선 이후인 74년에는 신민당 당수 경선에 나서 유신독재와 정면으로 맞섰다. 그러다 1979년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이던 YH무역 여공들이 강제 진압당한 YH사건으로 신민당 총재 직무를 정지당했다.

 

곧이어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에 박 정권 지지를 철회해 달라고 요구했다는 이유로 헌정 사상 유일무이한 의원직 제명까지 당하기도 했다.「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는 유명한 명언은 이때 나온 것이다. 의원직 제명은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본거지인 부산ㆍ경남 지역의 여론을 크게 악화시키면서 부마항쟁(부산, 마산 지역의 반정부 시위)으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1983년에는 5ㆍ18 광주항쟁 4주년을 맞아 민주화 요구 단식 투쟁을 하기도 했는데, 이 23일간의 단식은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 신당 창당 등을 거쳐 6ㆍ10항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후 1987년 민주화항쟁 이후 직선제로 실시된 제13대 대선에서 김대중 당시 평민당 후보와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2위로 낙선했다. 그러다 1990년 야합 비판을 받은 3당 합당을 통해 여당인 민주자유당 대표로 대선 후보가 됐으며, 1992년 12월 18일 실시된 제14대 대선에서 영원한 맞수이던 김대중 후보(민주당)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1961년 5·16 이후 기나긴 군부독재를 종식시키며, 1993년 2월 25일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자신의 정부를 최초의 '문민정부'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검찰 사정과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 등 정치 개혁을 필두로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척결에 앞장섰고,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수수 폭로 및 구속, 조선총독부 철거, 금융실명제 실시 등 핵심적인 개혁을 통해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특히 금융실명제 실시는 금융거래의 투명성과 형평 과세를 통해 경제의 투명성을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정권 말기인 1997년 1월 한보철강으로 시작된 도미노식 대기업 부도 사태와 차남 김현철의 국정 개입 등 일련의 사건으로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고, 무엇보다 집권 말기 IMF 구제금융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엄청난 국민적 비판 속에서 임기를 마감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98년 2월 라이벌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고 상도동으로 돌아갔다.

 

이후 2015년 11월 22일 김 전 대통령은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으로 향년 88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사상 처음 국가장(國家葬)으로 치러진 김 전 대통령의 장례는 11월 22~26일까지 5일간 진행됐으며, 영결식은 11월 26일 국회의사당에서 치러졌다. 영결식이 끝난 뒤 김 전 대통령의 운구 행렬은 46년간 거주했던 서울 상도동 사저와 대통령 기념도서관을 들렀으며 이후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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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김(YS-DJ) 시대,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김 전 대통령 서거로 민주화 동지이자 정치적 라이벌로, YS(김영삼 전 대통령)ㆍDJ(김대중 전 대통령)로 불리며 한국 현대 정치를 양분해 이끌어 왔던 양김(兩金) 시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두 사람은 민주화 투쟁을 위해 손을 잡았던 동지였지만, 권력 앞에선 각각 상도동계(YS)와 동교동계(DJ)라는 야당 2대 파벌 수장으로서 일생을 라이벌 관계로 살았다.

 

1970~80년대 유신체제와 5공 신군부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오랜 협력자였던 두 사람이 갈라진 것은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야권 후보 단일화 협상에 실패하면서부터였다. 이들은 목표로 했던 대통령직선제를 실현해 놓고도, 후보 단일화 실패(YS는 통일민주당, DJ는 평민당 후보로 출마)로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대권을 빼앗겼다. 이후 치러진 1992년 대선에서 YS는 노태우·김종필(JP)과 손잡고 3당 합당을 결행하며 집권 민자당 후보로, DJ는 제1야당(평화민주당)의 후보로 나섰는데, YS가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 3당 합당은 영호남 지역구도 고착으로 이어지면서 현재까지도 지역주의라는 그림자를 만들게 된 시초가 됐다.

 

이 여파로 DJ는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가 1995년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국민회의를 창당한다. 그리고 1997년 말 DJ가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이후에도 남북관계와 통일 등 이념 문제에 있어서 YS는 보수, DJ는 진보의 목소리를 대표하면서 대립했다. 그러다 YS가 2009년 8월 병마로 입원해 죽음을 앞둔 DJ를 전격 문병, 두 사람의 화해가 DJ 서거 직전 극적으로 이뤄지기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영삼 (시사상식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