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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활동

파격破格 - 통념을 넘어서려 했던 한국인들 1

by 도화유수 2021. 1. 5.

                                     ● 수강신청 방법은 다음 페이지 확인바랍니다.

◎ 수강신청 방법

이번 학기도 규장각 홈페이지에서 온라인으로 신청합니다.

팩스, 이메일, 방문접수 등은 불가능하며, 규장각 홈페이지(http//kjg.snu.ac.kr) 로그인 후 ‘교육 → 금요시민강좌 → 금요시민강좌 게시판 → 신청하기’에 접속하셔서 신청서 내용을 직접 입력하셔야 합니다.

수강신청 시, 이메일 아이디와 핸드폰 번호를 정확하게 기입해주십시오.

유의 사항: 이번 학기는 비대면 화상강의로 진행합니다. 수강생은 PC나 스마트 폰을 이용하여 매주 금요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진행하는 강사 선생님의 강의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온라인 플랫폼인 ZOOM 프로그램을 다운로드 받아서 활용해야 합니다.

이 수강 방식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지만, 컴퓨터 이용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에게는 조금 불편한 점이 있습니다. 수강 신청 시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ZOOM 프로그램을 이용한 수강 방식은 수강신청이 마무리된 후, 별도로 알려드리겠습니다.

 

 모집대상: 우리 역사와 문화에 관심 있는 시민 (성인) 120명

학관협력사업의 특성상 관악구 주민에게 우선권이 부여됩니다. 관악구민 정원 90명, 비관악구민 정원 30명입니다. 정원 초과시 모집 기간 이전이라도 조기 마감됩니다.

 

 접수방법: 규장각 홈페이지 로그인 후 수강신청 내용 직접 입력

▪ 수강신청 웹페이지 들어가는 방법 : 홈페이지 상단 메뉴바에서 ’교육>금요시민강좌’로 들어가서 ’신청하기’를 클릭한 뒤 신청 내용을 입력하시면 됩니다.

※접수 처리 후 확인 이메일을 발송합니다.

 

▪ 수강신청 기간 : 2020년 8월 25일(화) 오전 10시 ~ 9월 03일(목) 오후 6시

※수강정원을 초과한 경우 수강신청 접수가 중지될 수 있습니다.

※이메일, 팩스, 방문 접수는 모두 불가능하며, 오직 홈페이지를 통해서만 접수를 받습니다.

 수강료 : 1학기 20,000원

※ 먼저 수강신청을 해 주셔야 하며, 반드시 수강대상자인지 확인 메일을 받으신 후 본인 명의로 9월 10일(목)까지 입금해 주시기 바랍니다. 확인을 받지 않고 수강료 입금부터 하실 경우에 차후에 수강대상자가 아닌 것으로 최종 확정되면 환불 처리되며, 기한 내에 입금하지 않으실 경우 수강신청이 취소될 수 있습니다.

※ 수강료 납부 후 수강신청을 취소하실 경우 개강 전일(9월 17일 목요일)까지 취소 의사를 밝혀주셔야만 환불처리가 가능합니다.

계좌번호 : 농협 301-0146-4012-41 (예금주 :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 문의 : 880-9338(연구보조원 이은경), 880-2642(담당 교수 정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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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기에 신청했으나 코로나19사태로 강좌가 폐지되고 2학기에 다시 신청을 받음>

 

 

 

규장각의 역사

1776~1945 조선시대 규장각의 성립과 전개

1946~2005 서울대학교 규장각

1969~2005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2006~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왕립 학술기관 '규장각'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역사적 기원은 조선후기의 왕립 학술기관이었던 규장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규장각奎章閣’의 ‘奎’자는 천체天體 이십팔수二十八宿의 하나로 ‘문장을 주관하는 별자리’의 이름이다. 고대 중국에서 제왕帝王의 글을 ‘규장奎章’ 이라 부른 연유로, 조선에서 왕의 초상화·친필·저술·인장 등을 보관하는 건물을 규장각이라 이름 지었다.

1776년 정조正祖가 제22대 군주로 즉위한 직후 정식 국가기관으로 발족한 규장각은 역대 왕의 글·글씨·그림, 왕실의 족보 등을 보관 하는 기능뿐만 아니라, 전임專任 문신들이 학문을 연구하고 왕의 자문에 응하는 기능, 국정 운영의 참고 자료인 국내외 전적典籍을 수집 ·보관하는 기능, 서적을 출판하는 기능을 담당하였고, 한 때는 각신閣臣들이 왕의 친위세력을 형성하면서 국정 전반에 관여하기도 했다.

 

규장각과 정조 시대

일찍이 1463년(세조 9)에 양성지梁誠之가 역대 군주의 글을 보관하는 규장각의 설치를 건의하였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1694년(숙종 20)에 이르러 역대 왕의 친필과 저술을 보관하는 작은 건물을 종부시宗簿寺 부속으로 짓고, 국왕의 친필로 쓴 ‘奎章閣’ 현판을 처음으로 달았다. 1762년(영조 38) 후일의 정조는 왕세손王世孫에 봉해지면서 거처를 경희궁慶熙宮으로 옮기고 15년간 그곳에 머물렀다. 세손은 경희궁에 학문을 연구하고 논하는 장소로 주합루宙合樓와 존현각尊賢閣을 세우고, 별도로 정색당貞賾堂을 지어 서재로 사용하였다. 1776년(영조 52) 3월 영조의 승하로 왕위에 오른 정조는 본궁本宮인 창덕궁 금원禁苑에 규장각 창건을 명하였다. 9월에 2층 건물이 완성 되어 경희궁에 설치하였던 주합루를 2층으로 이전하였다. 그 건물의 아래층을 어제존각御製尊閣이라 하여 역대 선왕의 친필, 저술 등을 보관하였고, 별도로 서향각書香閣을 지었다. 곧 어제존각을 규장각으로 이름을 바꾸어 정조의 어진御眞, 어제御製, 어필御筆, 인장 등을 보관하고, 그곳에 보관되었던 선왕의 유품들은 봉모당奉謨堂을 새로 지어 옮겼다. 또한 주합루 일대에 열고관閱古觀, 개유와皆有窩, 서고西庫 등의 건물을 지어 국내외 서적을 수집 보관하였다. 그 때 처음으로 제학提學, 직제학直提學, 직각直閣, 대교待敎 등의 각신 閣臣을 임명함으로써 규장각은 나라의 정식 기구로 발족하였다. 정조는 규장각을 단지 역대 왕의 유품을 보관 관리하는 기구로 창설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당리당략黨利黨略에 몰두하는 조정 신하들의 풍조를 일신하고 국정을 바로 잡아나가기 위한 목적에서 규장각을 설치 하고, 유능한 선비를 발탁 임명하여 경사經史를 논하고 정사政事의 자문에 응하게 하였다.

규장각이 설치된 1776년 12월에는 서적의 출판 업무를 담당하는 교서관校書館을 규장각의 외각外閣으로 소속시켜 서책을 간행하게 하였다. 교서관에서 간행한 책들은 내각판內閣板 혹은 내각본內閣本이라 불렸는데, 판형이 정교하고 지질과 제본이 우수하여 당대當代부터 애장 愛藏되었다. 교서관 책판 1만 8천여 매가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정조는 1781년 2월부터 37세 이하의 초급 문관 가운데 재능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재교육시키는 프로그램인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를 시행하였다. 정조는 교육과정을 규정한 『문신강제절목文臣講製節目』을 만들고 이들을 대상으로 경전과 역사서 공부 및 문장 짓기를 집중적으로 수련하게 하고 이에 대한 시험도 치렀다. 선발된 초계문신은 당대의 최고 인재들이자 정조의 최측근으로서 개혁 정치의 실무자로 활동하였다. 1782년(정조 6)에는 강화도에 외규장각外奎章閣을 지어 효종대 이래 강화도의 내군기內軍器에 보관하여 온 역대 군주의 친필, 교명敎命, 왕실의 족보인 선보璿譜 등을 옮겼다.

 

정조 사후 규장각의 부침 浮沈

1800년(정조 24)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한 후부터 규장각의 기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초계문신 제도로 양성된 정조의 친위 세력이 1년이 못되어 와해되었고, 규장각이 누렸던 국정 최고자문기관의 기능도 완전히 상실하였다. 규장각의 각신閣臣은 계속 임명되었으나 명예직 이상의 큰 의미가 없었고, 부여된 임무는 역대 왕의 저술과 친필 등을 보관하는 업무로 제한되었다. 이 시기에는 정직正職의 각신들보다 잡직雜織으로 서얼庶孼 출신이 임명되었던 검서관檢書官들의 임무가 컸다. 이들은 『일성록日省錄』을 편찬하는 일을 계속 수행하였고, 중요한 서적의 출판시 감인監印(서적에 착오가 없는 지 확인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1863년(고종 즉위)에 흥선대원군이 집정하면서 규장각 현판이 종친부宗親府로 옮겨졌다. 그로부터 규장각의 전통적인 기능인 역대 왕의 저술, 친필, 초상화, 선원보첩璿源譜牒 등을 보관하는 임무를 종친부에서 수행하고 규장각에서는 주로 도서의 관리 임무만 담당하게 되었다. 대원군은 세도정치勢道政治로 실추된 종친부의 세력을 신장하기 위한 목적의 일환으로 이러한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1866년(고종 3) 발생한 병인양요丙寅洋擾 당시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외규장각 건물과 소장도서 5천여 책을 방화 파괴하면서 의궤儀軌 3백여 책을 약탈해 갔다.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었던 위 외규장각 의궤는 우리 정부와 프랑스 정부 사이의 반환 교섭을 통해 2011년 장기임대 형식으로 국내에 돌아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868년(고종 5)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규장각의 기능도 대부분 경복궁에서 수행하게 되었고, 관리하던 도서들도 대부분 경복궁의 부속 건물로 이전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 창덕궁으로 옮겼다. 1873년(고종 10) 이후 개화사상의 맹아와 더불어 규장각 도서에 대한 관심이 증대됨에 따라 규장각의 위상도 잠시 높아졌다. 이 때 『이문원서목摛文院書目』 등 규장각이 소장한 책들의 목록이 편찬 간행되었고, 개항 이후에는 상해上海에서 서양의 책들도 상당히 구입하여 규장각 부속 건물에 비치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왕실의 권한과 기능이 축소되면서 규장각은 신설된 궁내부宮內府에 귀속되었고, 이듬해에는 규장원奎章院으로 개칭되어 궁내부 산하 6개 기관 중 하나로 격하되는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정권이 바뀌고 왕실의 권한이 회복되면서 1897년(고종 34) 궁내부 관제가 개편될 때 규장원奎章院이 다시 규장각奎章閣으로 환원되고 기능도 회복되어 근대화 사업과 관계되는 신서新書를 다수 구입 관리하였다.

 

일제의 규장각 도서 장악

고종이 강제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한 직후인 1907년(융희 1) 11월의 관제官制 개정으로 규장각의 기능이 대폭 변경되었다. 규장각은 전래의 기본 임무인 역대 왕의 저술과 유물을 보관하는 업무 이외에 종친부와 홍문관의 업무를 통괄 담당하게 되었다. 우선 직제가 칙임勅任의 대제학大提學 1인과 제학提學 10인 이내, 주임奏任의 부제학副提學 10인 이내 외에고문으로 칙임의 기후관祇侯官 10인으로 확대되었는데, 당시 최고의 중신重臣들 중에서 선임되었다. 규장각의 주업무가 국유國有 도서 관리가 되면서, 홍문관弘文館, 시강원侍講院,집옥재集玉齋, 춘추관春秋館 등에 소장되었던 책들과 지방의 사고史庫에 보관되었던 전적典籍등 도합 10여만 권이 규장각 도서로 통합되어 ‘제실도서帝室圖書’로 명명되었다. 이때『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등이 규장각으로 이관되었다. 1910년 강제병합으로 규장각은 폐지되고, 제실도서帝室圖書는 잠시 이왕직李王職에서 관리하였으나, 이듬해 1911년 11월 조선총독부 취조국取調局에서 인수하고, 역대 왕의 어제, 어필, 선원보첩 등은 창경궁 내에 일본식 건물 봉모당奉慕堂과 보각譜閣을 지어 보관하고 이왕직에서 관리하게 하였다. 1912년에는 제실도서를 참사관분실參事官分室에서 관리하게 되었고 도서의 명칭을‘규장각도서奎章閣圖書’로 정하였다.1923년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이 설립된 후, 조선총독부는 규장각도서를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1928년부터 1930년 사이에 3차에 걸쳐 이관하였다. 이 때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으로 이관된 책이 총161,561 책이었으며, 그 중 일반동양도서로 분류된 20,648책을 제외한 140,913책이 규장각도서로 지정되었다.

규장각도서가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된 후 창덕궁 내의 규장각 건물들은 수난을 겪게 되었다. 이문원.文院 자리에는 일제의 창덕궁 경찰서가 들어섰고, 대유재大酉齋와 소유재小酉齋에는 검도장이 들어섰다.이안각移安閣과 주합루宙合樓와 부용정芙蓉亭은 남아서 오늘날 창덕궁 후원 안의 주요 명소가 되어 있으나, 열고관閱庫觀, 개유와皆酉窩, 서고西庫 등의 부속건물들은 헐리고 말았다.

 

                                                              <1층이 규장각이고, 2층 누각이 주합루(宙合樓)>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제3강의 제목은 <세조: 세조의 집권은 당시의 통념을 뛰어넘은 것인가?>

규장각 금요시민강좌 제3강 안내 관련메일 보기

보낸사람 :""이은경""주소록에 추가

보낸날짜 :2020/10/13 화요일 오후 2:55:22

받는사람 :""도상효"" 주소록에 추가

수강생 여러분께

안녕하십니까?

서울대학교-관악구 학관협력사업으로 열리고 있는 규장각 금요시민강좌 제24기 <파격破格 : 통념을 넘어서려 했던 한국인들> 다음 강의를 안내해 드립니다. 이번 금요일(10월 16일) 오후 2시 ZOOM으로 열리는 제3강의 제목은 <세조: 세조의 집권은 당시의 통념을 뛰어넘은 것인가?>입니다.

조선의 제7대 국왕 세조(世祖)는 역사적 평가의 빛과 그림자가 극명하게 나누어지는 임금입니다. 세조는 부왕 세종(世宗)의 업적을 계승하여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경국대전(經國大典)』·『동국통감(東國通鑑)』 등의 편찬을 추진하여 조선 초기 문물·제도 정비에 많은 공헌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세조가 왕위를 차지한 방식은 탈법적인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희생되었습니다. 또, 세조의 파행적 집권은 많은 공신(功臣)들을 양산하는 빌미가 되었고, 이는 정상적인 정국 운영에 큰 장애가 되었습니다. 세조의 집권은 성리학 국가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파격’적인 장면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조를 ‘파격’으로 평가하는 것이 세조가 살았던 당시의 통념이었는지, 아니면 후대의 시각인지는 좀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세조의 ‘파격’이 어떤 배경 속에서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집권 과정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번 강의를 맡아주실 분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강문식 선생님이십니다. 강문식 선생님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셨으며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으셨습니다. 선생님의 박사학위 논문 제목은 『權近의 經學과 經世觀』입니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시대 문화사』, 『권근의 경학사상 연구』, 『규장각, 그 역사와 문화의 재발견』, 『시대의 디자이너들(사람으로 읽는 한국사 04)』 등이 있습니다.

ZOOM으로 열리는 금요시민강좌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매주 동일함)

https://snu-ac-kr.zoom.us/j/98859744595

그럼 금요일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드림

 

제4강 10/23 원효 남동신(서울대 국사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