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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회문산 자연휴양림(꿈높이 등반대 2020.01.06~07)

by 도화유수 2020. 1. 9.

회문산 자연휴양림 입구


순창 고추장의 효시 만일사 장독대










회문산 [回文山]  높이 : 837m   위치 : 전북 순창군 구림면

회문산(830m)은 임실군, 순창군, 정읍시의 경계를 이루고 있고 산으로 회문봉, 장군봉, 깃대봉의 세 봉우리로 이루어지며 동서 8km, 남북 5km에 걸쳐있다. 옥정호에서 흘러내린 섬진강이 회문산을 두 팔로 감싸듯 휘감아 사방으로 물길이 흐르고 있어 산 정상에서 바라봤을 때 전망이 장관을 이룬다. 계곡이 많아 물놀이에 제격이며 특히 산 아랫마을인 덕치·천담의 계곡이 아름다워 해마다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예부터 영산으로 이름난 회문산은 많은 아픔의 역사가 깃들어 있다. 홍문대사(홍성문)가 입산 도통하여 ‘회문산가 24혈’의 명당 책자를 만들면서 영산이라 이름나기 시작하였다. 책 내용 중 회문산 정상에 24명당과 다섯 신선이 앉아 바둑을 두고 있는 형국인 오선위기(五仙圍基) 자리가 있는데, 이곳에 관을 보토하여 묘를 쓰고 나면 당대부터 발복하여 59대까지 갈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처형을 당할 때 3족을 멸하는 화를 면하기 위해서 동생 란식과 조카 현채가 기거하였고 두 분의 묘소가 현존하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 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때 동학군은 이 산을 거점으로 투쟁을 하였으며 한말에 국운이 기울어 일제 침략의 마수가 뻗치던 무렵에는 회문산을 근거지로 하여 정읍의 최익현, 임실의 임병찬 의병장이 회문산을 거점으로 항일구국운동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1950년 6·25전쟁이 벌어지고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과 북진으로 고립된 인민군과 공산당들이 회문산으로 옮겨와 자리잡고 험한 산을 의지하여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자 국군은 전투기까지 동원하여 토벌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전북 임실군과 순창군 경계에 웅크리고 있는 회문산은 가족단위 산행지로 적격이다. 숲이 무성하지만 해발이 830m로 그다지 높지 않고 호젓한 분위기와 광활한 전망이 일품이다. 북으로는 섬진강,동으로 오원천, 남으로 구림천이 싸고 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지리산까지 보여 예로부터 천혜의 요새로 알려진 산이다.

짙은 숲속에선 하루종일 꾀꼬리 산비둘기가 울고 까투리와 장끼가 사랑을 속삭인다. 자연휴양림으로 탈바꿈한 회문산은 얼룩진 과거사를 묻어둔 채 가족단위 자연공원으로 각광 받고 있다.

회문산 산행은 자연휴양림 입구인 안정리 안심마을에서 시작된다. 30분쯤 오르면 자연휴양림 매표소가 나오고 다시 10분쯤 걸으면 왼쪽 노령문 직전 왼편의 골짜기에서 이가 시리도록 찬 석간수가 샘솟는다. 노령문을 통과하면 출렁다리가 나타나고 그 밑으로 포말을 일으키며 떨어지는 구룡폭포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 폭포를 중심으로 아래에는 작은 문턱바위,위에는 큰 문턱바위가 버티고 있다.

휴양림 관리사무소를 지나 5-6분 오르면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마주 앉아 회문산의 산세를 논했다는 무학바위가 자리잡고 있다. 임간학교-산림욕장으로 거치면 본격적인 회문산 능선산행이 시작되는 안부에 도착한다.이곳에서 작은 지붕을 거쳐 정상인 큰 지붕까지는 대략 1시간 정도 걸린다.

하산은 천마봉-회문리, 북릉-백여리로 한다. 정상 남서쪽 마을인 죽림마을로 내려오는 계곡길도 있다. 귀염받날이라 불리는 천마봉 능선을 타면 27번 국도로 내려서기 때문에 돌아오기 편하다.


점심식사후 마트에서 장을 보아 회문산자연휴양림으로 빗속을 달려온다. 입구에서 수속을 마치고 등산에 관한 정보를 파악한다.

시어나무갈림길을 이용하여 정상에서 되돌아오는 것이 이런 악천후에는 적합하다는 결론.

처음 계획 등산로


악천후로 변경 등산로 (차량으로  이동후 서어나무-서어나무갈림길-정상에서 되돌아 옴)










보호수인 서어나무

어느 블로그에 오른 [서어나무 이야기]

삼육대 캠퍼스 내에 제명호라는 호수가 있다. 제명호에는 연인들이 손을 잡고 일곱번 찾아오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애기가 있다. 제명호에 있는 제명정 뒤로 우리나라 중부지방의 극상수인 서어나무 군락지를 만난다. 숲이 발달하면 극상림에 이르게 되는데 이 마지막 단계에서 숲을 이루는 나무가 서어나무라고 한다. 옛날 사람들은 서어나무 줄기가 울퉁불퉁하여 별 쓸모가 없었나 보다. 재목감으로도 그렇고 농기구 만들기도 부적당하여 넌 ㄱ,냥 그자리에 서 있어라 해서 서어나무가 되었다는는 아니면 말고 식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1월 7일 휴양림 산딸나무에서 1박후 아침식사를 마치고 어제 지나친 회문산 역사관(옛 빨치산 사령부) 를 돌아 본다.









이제 자연휴양림을 떠나 인근의 만일사를 찾는다. 만일사 비에 모든 기록이 있다.


     만일사 비[ 萬日寺碑 ]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안심길 103-134[안정리 337] 

만일사 비(萬日寺碑)는 순창 회문산 끝자락에 있는 만일사 어귀에 있는데, 음기(陰記)에 사찰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비문에 의하면 만일사는 백제 때 창건되어 조선의 무학 대사(無學大師)[1327~1405]가 중창한 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다시 중건되었다. 만일사 비는 이 같은 만일사의 유래를 담아 사찰 중건 후인 1658년(효종 9)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옥천지』에 의하면 중건 이후의 만일사는 요사채 2채, 동암(東庵)·칠성각(七聖閣)·선적암(禪寂庵) 등 3채의 암자가 있었다. 한편 만일사는 빼어난 산세와 함께 많은 고승이 배출되었다고 전한다. 내장사 주지(住持) 만암(曼庵)과 야은(野隱) 등 많은 불제자를 배출한 백학명(白鶴鳴) 선사가 만일사의 금화(錦華) 주지(住持)로부터 법통(法統)을 이어받았다. 또 불교 전문학교를 설립하고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의 스승이며 조선의 천재로 알려진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1870~1948] 스님도 한때 만일사에서 수도하였다. 그리하여 사찰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으나, 일제 강점기를 겪으면서 절이 폐허가 되었다. 1954년 다시 법당을 세우기 시작하여 1998년 대웅전, 일주문, 요사채 각 1동씩을 건립하여 도량을 갖추었다.

그동안 무학 대사가 만일사를 중건하였다는 말은 전하여 왔지만, 이에 대한 기록을 찾지 못하였는데 만일사 비를 통해 비로소 무학 대사의 중창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만일사’란 명칭은 무학 대사가 이성계(李成桂)[1335~1408]를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하기 위해 만 일(萬日) 동안 기도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또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무학 대사를 만나기 위해 만일사를 찾은 적이 있으며, 이때 민가에 들러 먹던 고추장 맛이 어찌나 좋던지 그 맛을 잊지 못하여 왕이 된 후에도 순창 고추장을 진상하게 하였다는 얘기도 있다. 무학 대사 이전에도 여러 차례 중건이 있었겠지만 기록이 없어 내력을 알 수 없다.

위치 : 순창에서 회문산 방향 회문산로를 가다가 회문산 자연 휴양림의 표지판이 나오면 우회전한 후 산 중턱에서 좌회전하여 조금 더 가면 만일사가 나온다. 만일사는 순창군 구림면 안정리 337번지[안심길 103-134]로 회문산 자락 산안 마을에 있으며, 만일사 비는 만일사 어귀에 있다.

형태 : 만일사 비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한옥 기와지붕 비각 안에 있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 홍살문을 달았다. 좌대(座臺)는 자연석을 사용하였고, 이수(螭首)는 반원 형태이며 갖가지 연꽃이 조각되어 있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171㎝, 너비 71㎝, 두께 13㎝이다.

금석문 : 만일사 비는 재질이 사석(沙石)으로 이루어져 글자가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사석은 굵은 모래가 풍우로 떨어져 나가기 때문에 비석의 재질로는 좋지 않은 편이다. 탁본한 뒤 판독이 가능한 글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조선국 전남도 옥천군 회문 산성 만일진 고금비. 만일사는 백제 때 창건된 사찰로, 우리 조선 태조 강헌 대왕[이성계] 때에 이르러 무학과 나옹 선사(懶翁禪師)가 무너진 사찰을 중창하였다. 이후 정유재란 때 왜구들에게 분탕질을 당한 후 지홍·원측[무심] 스님 등이 오랫동안 중창의 뜻을 가지고 권선하여 시주자들을 모아 건물을 다시 세우고 예전처럼 복원하여 더욱 빛나고 새로워졌다.

그러니 어찌 이런 사실을 비에 새겨 훗날에 전할 마음이 없겠는가마는 슬프도다. 사찰 창건 이후 지금까지의 내력을 모두 서술하고 싶어도 문헌에서 새길 만한 기록을 찾기 어렵고, 또 이와 관련된 것들조차 찾기 힘들다. 따라서 어리석은 내가 감히 비문을 지을 수 없지만, 청신녀(淸信女)들이 돌을 쌓아 기단을 세우고 사찰을 중건한 일이 어디에도 없으니 이처럼 갸륵한 일을 훗날에 전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그래서 일의 전말을 이 비에 새겨 훗날 옛일을 징험토록 하고자 한다. 이에 서(序)할 것은 서하고, 명(銘)할 것은 명하여 타일에 박람 군자(博覽君子)를 기다려 본다.”

의의와 평가 : 만일사에는 「고추장과 이성계」 및 「이성계와 만일사」 설화가 담겨 있다고 얘기하는데, 비석이 마모되어 아직까지 연관성을 찾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좀 더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사진으로 확인한 회문산(回文山) 837m, 만일사(萬日寺) 일정>

1/6(월)

14:38 전북도립미술관 주차장 출발

14:43~15:18 촌민 팥칼국수

15:34 구이 하나로 마트

16:15 회문산 자연휴양림

16:50 서어나무 보호수

16:56 서어나무갈림길, 회문산 정상 0.7km

17:06 장군봉갈림길, 회문산 정상 0.4km

17:18~19 회문산 정상(큰지붕)(해발837m)

17:25 장군봉 갈림길

17:31 서어나무 갈림길

17:34 서어나무 보호수

17:39 도로

17:58 숙소

18:44 저녁

1/7(화)

06:30 기상

08:30 회문산 자연휴양림 출발

08:41~56 만일사(萬日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