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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국내여행

덕수궁 탐방(2016.12.09)

by 도화유수 2016. 12. 10.

 

덕수궁[ Deoksugung Palace , 德壽宮 ]

서울시 중구 정동(貞洞)에 있는 조선 시대의 궁궐로 원래의 명칭은 경운궁(慶運宮)이지만,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뒤 이곳에 살면서 명칭을 덕수궁(德壽宮)으로 바꾸었다.

1963년 1월 18일 사적 제124호로 지정되었다. 원래 명칭은 경운궁(慶運宮)이지만,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를 한 뒤 이 곳에 살자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뜻에서 덕수궁(德壽宮)으로 개칭되었다.

현재 덕수궁의 자리는 본래 세조(世祖)의 큰아들인 도원군(桃源君: 暲)의 큰아들, 즉 세조의 큰손자인 월산대군(月山大君, 婷)의 개인 저택이었다. 도원군은 세자(世子)로 책봉되었으나 20세에 죽었다. 그래서 세자빈(世子嬪) 한(韓)씨가 출궁(出宮)을 할 때 나라에서 이 집을 지어주고 두 아들과 함께 살게 하였다. 둘째 아들인 잘산군(乽山君)이 성종(成宗)으로 즉위하면서 그의 어머니인 한씨도 입궐하게 되어 월산대군만이 거처하게 되었다.

1593년 임진왜란으로 의주(義州)로 피신했던 선조가 한성으로 돌아온 뒤에 이 곳을 임시거처로 하여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이라 하였다. 그리고 경내가 협소하여 계림군(桂林君:瑠)의 집을 포함하였으며, 궁궐 안에 있어야 할 관청들도 처음에는 궐문 밖에 두었다가 점차 면적을 넓혀 모두 궁궐 안에 들게 하였다. 또 그 옆에 있는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의 집을 동궁(東宮)으로, 영상(領相) 심연원(沈連源)의 집을 종묘(宗廟)로 하였다. 1597년에 담을 둘러쌓았고, 1607년 4월에는 북쪽에 별전(別殿)을 세웠다. 선조는 1593년 10월 이곳을 행궁으로 삼은 뒤 1608년 2월 죽을 때까지 이 곳에서 정무(政務)를 보았으며, 광해군(光海君)도 이 곳 서청(西廳)에서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즉위한 뒤에 행궁을 넓혀 지금의 정동 1번지 일대를 대부분 궁궐의 경내로 만들고 종묘를 중건하였다. 그리고 1611년(광해군 3) 10월 창덕궁(昌德宮)을 보수하여 거처를 옮긴 뒤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으로 하였다. 광해군은 창덕궁에서 약 2개월간 살다가 다시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고, 1615년 4월 다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1618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한 뒤에 경운궁에 유폐(幽閉)하였으며, 당시 경운궁은 서궁(西宮)이라 불렸다. 그리고 1620년에는 궁궐의 아문(衙門) 등을 허물어 궁은 더욱 퇴락하게 되었다.

1623년 3월 서인(西人) 이귀(李貴), 최명길(崔鳴吉) 등이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陵陽君)을 왕으로 추대하는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인조는 경운궁 즉조당(卽阼堂)에서 즉위하였지만, 곧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긴 뒤 가옥이나 대지를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때문에 경운궁은 한적한 별궁 정도로 축소되었다. 그 뒤 영조(英祖)는 1773년(영조 49), 즉 선조의 환도어거(還都御居) 3주갑(三週甲, 60년이 3번 지남)을 맞이하는 해의 2월 1일 세손(후의 正祖)과 함께 경운궁 즉조당에서 선조의 고생을 회상하면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고종(高宗)도 1876년(고종 13) 즉조당에서 전배(展拜)하였다.

경운궁이 다시 궁궐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이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면서 태후(太后)와 태자비(太子妃)는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겨 생활하였다. 그리고 1897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다시 전각 등의 건립이 이루어졌다. 그 해 9월에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세워지고,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한 뒤에는 정궁(正宮)이 되었다.

1904년에는 큰 화재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으나, 1905년 즉조당(卽祚堂), 석어당(昔御堂), 경효전(景孝殿), 함녕전(咸寧殿) 등이 중건되었다. 1906년에는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한 뒤에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하고 정문으로 삼았다. 1907년 순종이 즉위한 뒤에, 순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고, 고종이 이 곳에 거주하였다. 이 때 명칭을 경운궁에서 덕수궁(德壽宮)으로 바꾸었으며, 1910년에는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石造殿)이 건립되었다.

현재 6만 1500㎡의 면적에 대한문(大漢門), 중화문(中和門), 광명문(光明門)이 있으며, 중화전(中和殿), 석어당(昔御堂), 준명당(俊明堂), 즉조당(卽祚堂), 함녕전(咸寧殿), 덕홍전(德弘殿), 석조전(石造殿) 등의 전각이 있다. 조선 시대 궁궐 가운데 가장 규모가 작으며, 개인 저택을 궁궐로 개축하였기 때문에 전각 배치도 정연하지 못하다. 그리고 석조전(石造殿)과 정관헌(靜觀軒) 등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 있어서 고유한 궁궐의 양식과는 다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2. 대한문     규모:83.31㎡

연혁:원래 궁궐의 정문은 남쪽으로 난 인화문(仁化門)이었는데, 환구단 건립 등으로 경운궁의 동쪽이 새로운 도심이 되자 동문인 대안문(大安門)을 정문으로 삼았다. 1906년에 대한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70년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서쪽으로 물러 앉게 되면서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았으며, 대한문을 지나 건너게 되는 금천교는 1986년에 발굴 복원한 것이다.

3.중화문(보물 제819호)     규모:83.31㎡

연혁:1902년 건립된 중화전의 정문으로 1904년 화재로 소실된 후 새로 만들어 새웠으며 본래 중화문 좌우에 행각이 있었으나 없어지고 동측에 일부만 남아있다. 

 

4.중화전(보물 제819호)     규모:409.3㎡

연혁:고종께서 1897년에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하면서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였으나 협소하였으므로 1902년 새로운 정전으로 중화전을 지었다. 본래는 2층으로 된 중층 건물이었으나 1904년 4월 화재로 소실된 후 현재의 단층 건물로 중건되었다. 앞뜰에 조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문무백관의 위치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좌우에 있으며, 중화전의 정문으로 중화문이 있다.  

 

5.준명당      규모:231.43㎡

연혁:이 건물의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종(高宗)때에 중건된 것으로 추측되는 목조 건물로 즉조당과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고종께서 신하나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곳으로, 함녕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고종의 침전으로 쓰였다. 정면 6칸, 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집이며 높은 기단위에 세워졌다.좌우 툇간에 쪽마루를 두고 있다. 1916년 4월에는 덕혜옹주 교육을 위해 이곳을 유치원으로 개설하기도 하였다.  

 

6.즉조당      규모:131.93㎡

연혁:준명당(俊明堂)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 이 건물은 15대 광해군(光海君)과 16대 인조가 즉위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1897년 고종의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한 직후 정전으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며, 이때 즉조전의 이름을 태극전, 중화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2년 새로운 정전이 세워지자 다시 즉조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1904년 화재로 손실되었는데 그해에 다시 석어당, 함녕전과 같이 중건하였다. 고종의 후비인 순헌황귀비 엄씨가 1907년부터 1911년 7월 승하할 때까지 이곳에서 거처하셨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준명당과 즉조당은 서로 연결되어있다.

7.석어당      규모:229.19㎡

연혁: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고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같은 해에 중건하였다. 덕수궁의 유일한 중층의 목조 건물로 선조(宣祖)께서 임진왜란 중 의주로 가셨다가 환도한 후 이곳에서 거처하셨고 1608년 2월 선조가 승하한 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또한 인목왕후가 광해군에 의해 유폐되었던 곳이기도 하며,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광해군(光海君)을 석어당 뜰 아래 꿇어 앉히고 광해군의 죄를 문책한 곳 이기도하다.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으로 아래층은 정면 8칸, 측면 4칸이며 위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8.덕홍전       규모:127.54㎡

연혁:함녕전을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할 때 일반 빈객들을 접견하기 위하여 1906년 건립한 후 1911년에 개조하였다. 덕홍전은 주로 황제가 외국 사신이나, 대신들을 만나던 접견실로 쓰였다고 알려져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4칸이며 겹처마 팔작지붕의 단층 건물이다. 측면에는 좌우 툇간이 있어서 전체의 평면은 정사각형에 가깝다. 이 건물 주위에는 행각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행각 일부만 함녕전 남행각에 연접되어있다.  

 

9.함녕전(보물 제820호)      규모:343.77㎡

연혁:1897년 건립되었으며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되었다. 1904년 4월 함녕전 온돌 수리 공사 중 일어난 화재로 함녕전은 물론 덕수궁 내 주요 전각들이 모두 소실되었고 함녕전은 같은 해 12월에 중건되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께서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함녕전 왼편

함녕전 오른편 측면

10.정관헌      규모:269.55㎡

연혁:1900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동서양 양식을 모두 갖춘 정관헌은 고종께서 다과회를 개최하고 음악을 감상하시던 곳이며 한때 이곳에 태조(太祖)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였다. 설계는 사바찐이 하였으며,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5칸이다. 정관헌의 지붕은 동양식으로 팔작 지붕이 덮여있고, 둘레에는 서양식으로 차양칸이 위치한 독특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정관헌 난간에는 사슴, 소나무, 당초, 박쥐 등 전통 문양을 넣었다.

 

11.석조전       규모:3,986.65㎡

연혁:조선시대 궁중건물 중 대표적인 유럽풍의 석조 건축물로 영국인 "하딩"이 설계하였고, 1900년 기공되어 1910년에 준공되었다. 고종(高宗)께서는 석조전에서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들을 만나는 용도로 석조전을 사용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기 이전까지는 현대미술품을 진열하였으며 1946년~1947년까지 미·소 공동위원회가 사용하였고, 1948년~1950년에는 유엔 한국위원단이 이곳을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시 건물 일부가 파괴되어 1955년 육군 공병단에 의해 수리되었으며 그 후 국립중앙박물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사용하기도하였다.  

 

12.석조전 서관(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규모:3,428.47㎡

연혁:1936년 8월 기공하여 1938년 6월에 준공하였으며 이왕가 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13.광명문    규모:56.53㎡

연혁:1897년에 건립하였으나 1904년에 소실되었다가 중건된 목조 건물로 당초 함녕전의 정문이었으나 1938년 미술관 개관 시 흥천 사종과 창경궁 자격루를 진열하기 위하여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14.중명전       규모:784.49㎡

연혁: 연혁 : 1897년 경복궁 집옥재와 같은 황실의 도서와 보물을 보관하는 용도로 계획되었으며, 건립 시 수옥헌(漱玉軒)이라 불렸다. 경운궁(현 덕수궁) 담장 밖, 미국공사관(현 미국대사관저) 서쪽에 장로교 여선교사들이 세운 정동여학교 터를 인수하여 문화각(文華閣)과 정이재(貞彛齋), 외(外) 화보(貨寶)곳간과 함께 건립되었다.

설계는 한성부 건축기사로 초빙된 미국인 J.H. 다이(Dye)가 하였으며, 1899년 초 준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에는 1층의 서양식 건물로 완성되었으나, 1901년 11월 화재로 전소되어 이듬해 회랑이 있는 2층 건물로 재건축되었다.

1904년 4월 14일 대화재로 황궁이 전소되자 고종이 이 권역으로 넘어와 수옥헌을 편전이나 알현실로 사용하였다. 이때 황족의 거처가 구비되고 의정부 건물이 신설되는 등 수옥헌의 권역이 확대되었다.

1905년에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수옥헌을 에워싸고 강압적으로 조약 체결을 강요하여 강제로 을사늑약이 이곳에서 체결되었다. 이듬해부터 수옥헌은 중명전(重明殿)으로 불리었다.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노력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고, 특히 1907년 헤이그로 파견한 특사 사건을 빌미로 강제퇴위 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고종은 덕수궁 내 준명전(濬明殿)으로 이어하였다. 이후 중명전은 1912년경부터 외국인구락부로 사용되다가 1925년 화재로 외벽만 남기고 소실된 후 형태가 변경되어 재건되었다. 광복 이후 서울클럽, 민간인 사업체 등에서 사용하였다가 2007년 복원공사를 진행하고, 2010년 실내에 전시물을 갖추어 대중의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덕수궁 돌담길

 

 덕수궁에서 본 주변 경관 서울시청의 상부가 보인다.

시청 앞 프레지던트 호텔

대한문에서 본 서울시청. 크리스마스츄리가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