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등산

아! 공룡능선 2.오세암 가는 길(2024.06.19)

by 도화유수 2024. 6. 23.

영시암
오세암
오세암에서 바라본 만경대

 

백담사를 돌아보고 바로 오늘의 목표지점인 오세암을 향한다. 아래지도에 보는봐와 같이 영시암에서 오세암방향으로 가면된다. 그렇게 힘들지 않은 코스이다.   13:30백담사 출발

 

15:00 영시암 도착

 

영시암[永矢庵]

강원도 인제군 북면 설악산(雪嶽山)에 있는 조선후기 삼연 김창흡이 창건한 암자.

역사적 변천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이 1709년(숙종 35년)에 창건해 6년간 머물렀다. 그 뒤 폐허로 남아 있던 것을 1691년(숙종 17) 설정(雪淨)이 승당과 비각을 중건했다. 1760년(영조 36) 석존불을 개금했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 주지 이기호(李基鎬)가 중수했고, 1950년 6·25전쟁으로 전각이 소실된 것을 1994년 백담사 주지 설봉도윤(雪峯道允)이 중창했다.

내용

1709년 조선 후기의 유학자 김창흡이 심원사 남쪽의 조원봉 아래에 정사를 창건했다. 그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부친 김수항(金壽恒)이 사사(賜死)된 뒤로는 세상에 진출할 뜻이 없었는데 1705년(숙종 31) 모친상을 마치고 설악산으로 들어가 백담사에서 3년을 지내다가 1707년(숙종 33) 조원봉 남쪽 벽운사 옆에 벽운정사(碧雲精舍)를 지었다. 이후 건물에 불이 나자 서쪽으로 몇 리 더 깊숙한 곳에 정사를 다시 지어 머물렀다. 방을 연묵실(淵黙室), 당을 산립당(山立堂), 다락을 연백루(延白樓) 혹은 지백루(知白樓)라고 하였다.

「삼연 김선생 영시암 유허지비(三淵金先生永矢庵遺墟之碑)」에 의하면 “기축( 1709)년 10월에 다시 절에 돌아왔다가 동쪽 수리(數里)에 있는 조원봉 아래 북쪽에 판잣집 8칸을 짓고 영시암(永矢庵)이라고 이름했다”고 한다. 영시암이란 이름은 김창흡이 이 절에 은거하여 죽을 때까지 세상에 나가지 않겠다는 맹세의 뜻을 담고 있다. 그가 이곳에 머문 지 6년이 되던 해인 1714년(숙종 40) 11월에 공역(供役)을 하던 찬모(饌母)가 호랑이에게 물려 변을 당하자 춘천으로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찰은 그 뒤 폐허가 되었다.

1749년(영조 25) 인제현감 이광구(李廣矩)가 「김삼연유허비(金三淵遺墟碑)」를 세웠으며 그 후로 김창흡의 후손과 문인들이 기록으로 남기는 등 주목을 받았다. 1691년에 오세암의 주지였던 설정(雪淨)이 조원봉 북쪽에 승당 24칸과 비각 1칸을 중건하고 자비성상(慈悲聖像)을 봉안했다. 관동 관찰사에게 절의 지난 내력을 알리고 의논한 뒤 유불(儒佛)을 사모하는 공덕자(公德者)들로부터 재물을 모아 절을 중건하고 낙성하였다. 절의 규모가 높고 크며 견고함이 천궁(天宮) 같았다고 한다.

풍악과인(楓嶽過人)이 지은 「영시암 개금 불사기(永矢庵 改金 佛事記)」에 의하면 옛 암자는 조운봉 아래 있었으나 이곳으로 옮겨지었다. 1760년 11월 7일에는 절에서 제일 오래되고 큰 석존불에 개금을 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31 본산 건봉사의 말사였으며 1925년 이기호가 영시암 주지로 부임하면서 절을 중수하였다. 그 후 윤기중(尹基重, 1931~1934)과 김재호(金在浩, 1934~1940)가 주지에 재임하였다.

6·25전쟁 시 전각들이 불에 타버린 것을 백담사 주지 설봉도윤이 1992년부터 1994년까지 김창흡의 후손인 서예가 형제 김충현(金忠顯)과 김응현(金膺顯)의 후원을 받아 법당과 삼성각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인의 주목을 받았던 설악산의 유명사찰로 조선 후기 유 · 불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시암 [永矢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영시암에서는 더운 물, 커피등 을 제공한다.
오세암 봉정암으로 가는 끝 암자는 툇마루를 넓게 만들어 등산객의 휴식을 준다. 늘 감사한 마음!!!

 

17:00 오세암 도착

 

오세암[ 五歲庵 ]

요약 :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 있는 암자.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백담사의 부속암자이다. 백담사에서 약 6㎞ 떨어진 곳에 있으며, 영시암을 지나 마등령으로 가는 길에 있다. 647년(신라 선덕여왕 13) 자장(慈藏:590~658)이 이 곳에 선실(禪室)을 지은 뒤, 관세음보살이 언제나 함께 있는 도량이라는 뜻으로 관음암(觀音庵)이라고 하였다. 1445년(조선 세조 1)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이 이 곳에서 출가하였고, 1548년(명종 3) 보우(普雨)가 이 곳에서 기도하다가 문정왕후에 의해 선종판사로 발탁되었다. 1643년(인조 21) 설정(雪淨)이 중건하고 오세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이름을 바꾼 데 따른 전설이 전하고 있다.

설정이 고아가 된 형님의 아들을 이 암자에서 키웠는데, 어느 날 월동 준비를 하기 위해 혼자 양양까지 다녀와야 했다. 그 동안 혼자 있을 4세된 어린 조카를 위하여 며칠 동안 먹을 밥을 지어놓고, 조카에게 밥을 먹고 난 뒤 법당에 있는 관세음보살상에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이라고 부르면 잘 보살펴줄 거라고 일러주고 암자를 떠났다. 그러나 설정은 밤새 내린 폭설로 이듬해 눈이 녹을 때까지 암자로 갈 수 없게 되었다. 눈이 녹자마자 암자로 달려간 설정은 법당에서 목탁을 치면서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는 조카를 보게 되었다. 어찌된 연유인지 까닭을 물으니 조카는 관세음보살이 때마다 찾아와 밥도 주고 재워 주고 같이 놀아 주었다고 하였다. 그때 흰 옷을 입은 젊은 여인이 관음봉에서 내려와 조카의 머리를 만지며 성불(成佛)의 기별을 주고는 새로 변하여 날아갔다. 이에 감동한 설정은 어린 동자가 관세음보살의 신력으로 살아난 것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암자를 중건하고 오세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1856년(고종2) 남호가 해인사의 《고려 대장경》 2질을 인출하여 1부는 오대산 상원사에, 1부는 이 곳에 봉안하였다. 1888년(고종 25)에는 백하가 2층 법당을 짓고 응진전을 건립하여 16나한상과 각종 탱화를 조성, 봉안하는 등 크게 중건하였다. 그뒤 6·25 전쟁 때 일부 소실되었으나 지금도 수선 도량과 관음기도 도량으로 알려져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법당 뒤로는 관음봉·동자봉이, 오른쪽으로는 공룡릉이 올려다보이며, 인근에 내설악의 꽃으로 일컬어지는 만경대가 있다. 주변에 백담사·용대자연휴양림·십이선녀탕계곡·옥녀탕계곡·장수대·대승폭포 등 관광지가 많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세암 [五歲庵]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오세암은 정말 멋진 절경을 가지고 있다. 설악의 멋진풍광이 산사에서 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