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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염불사의 보리수나무(2023.06.14)

by 도화유수 2023. 6. 19.

염불사 대웅전 앞 수령500년이 넘은 보리수
삼막사의 대웅전 역활을 하는 육관음전(대웅전은 1990년 화재로 소실)

6월 14일(수) 오전 영화초등학교 국화향기봉사활동을 마치고 집에 오니 오후에 크게 할일이 없어 마음먹고 산행을 나서기로 한다. 점심을 먹자마자 짐을 챙겨 관악산으로 나선다. 가면서 행선지도 결정할 요랑이다.

결과로 본 오늘의 행선 : 사당동 집- 까치산 - 낙성대역 4번출구 - 2번 마을버스 - 서울대 건설환경종합연구소 - 제4야영장 - 삼성산 거북바위 - 삼막사 - 염불사 - 안양예술공원 - 2번 마을버스 - 안양역 - 가산디지털역 - 남성역 - 귀가

15:51 아파트화단에 핀 나리꽃(출발시간)

까치산을 넘어 걸어서 낙성대역 4번출구 옆 2번 마을 버스로 서울대학을 가로질려 가려고 한다.

13:22 낙성대역 4번출구에서 나와 2번마을 버스를 타고
서울대학교 건설환경종합연구소앞에서 내린다.
13:57 제4양영장

빈 평상에 누워 명상에 한참 잠겨 여유를 부리고

싸리꽃이 한창이다.
14:31 약수터
14:33 삼거리 약수터
14:58 거북바위
삼막사로 내려가는 길 왼편 바위에 새겨진 굴

삼막사(三幕寺)

삼성산(三聖山)에 위치한 전통사찰 제9호인 삼막사는 신라시대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한 후, 조선 초기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중수하였고, 서산대사 (西山大師)등이 수도한 곳이라고 전해져 온다.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지금으로부터 1300 여년 전인 신라 문무왕 17년(677년)에 원효, 의상, 윤필 등 세 스님이 암자를 지어 정진한 바로 그 위치에 삼막사가 지어졌다고 하며, 삼성산(三聖山)이라는 이름도 이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불상을 모셔 관음사(觀音寺)로 부르다, 사찰이 융성해지면서 도량의 짜임이 중국 소주(昭州)의 삼막사(三邈寺)를 닮아 삼막사로 불렀는데, 언제부터인가 삼막(三幕)으로 바뀌었다. 근대에는 지운영(池雲英)이 이곳에 백련암(白蓮庵)을 지어 은거하였고 현재 조선후기 건축양식인 망해루(望海樓)와 명왕전(冥王殿)(경기도 유형문화재)이 있으며 고려시대 삼층석탑(三層石塔)인 일명 살례탑(경기도 유형문화재)과 사적비(事蹟碑)(경기도 유형 문화재), 삼막사 남녀근석(男女根石)(경기도 민속자료), 삼막사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 (경기도 유형문화재) 외에도 삼귀자(三龜字), 감로정(甘露井) 등 다수의 비지정 문화재가 있어 삼막사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원래의 대웅전은 1990년 12월 6일 화재로 소실되어 버려 지금은 육관음전이 대웅전의 역할을 하고 있다. 

대웅전역활을 하는 육관음전

안양예술공원쪽으로 가려고 출발한다. 조금 가니 삼막사가 잘보이는 전망대가 나온다.

15:36 이곳에서 염불사 방향으로 내려간다. 아주 가파른 길이다.
15:47 염불사 대웅전

염불사(念佛寺)

주소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예술공원로245번길 150 (석수동)

염불사의 창건은 삼성산의 전설과 맞닿아 있다. 신라 문무왕 때 원효, 의상, 윤필 세 조사가 이 산에 들어와 원효대사는 삼막사를 창건하고, 의상대사가 연주암을 세웠으며, 윤필거사가 염불사를 창건해 각각 그 절에서 수도생활을 했다고 한다. 염불사의 가장 큰 자랑은 삼성산 중턱을 병풍처럼 두른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이 어우러진 수려한 풍광. 절의 건물들이 서로의 위계에 따라 각기 다른 높이에 위치해 있어서 각 건물마다 전혀 다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칠성각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아름답다. 염불사는 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에 딸린 말사다.       출처:안양시청 홈페이지

 

밝은 기운 널리 퍼뜨리는 염불사의 상징

염불사 대웅전 앞마당, 보리수 한 그루의 신록이 눈부시다. 절을 감싼 산림 전체가 신록으로 가득하지만 석가모니 부처를 가까이서 모시는 보리수는 그 중 주인공 같다. 6월의 녹색보다 노란 꽃이 더 고귀하게 보이고 고(苦)를 모르는 순수한 청춘과 같은데 나무는 어느덧 500년을 넘게 살았다.

현재의 모습은 전보다 많이 야윈 것이라고 한다. 수년 전 태풍에 가지가 잘려나갔고 나이 들어 약해진 몸통은 시멘트가 들어찼다. 그럼에도 의연한 나무는 누구에게나 봄의 기운을 나누어 주는 중이다.

출가 후 6년간의 고행한 끝에 보리수 아래 앉은 싯다르타. 깊은 선정에 든 그는 마침내 세상 이치의 깨달음을 얻는다. 그 깨달음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부처의 가르침이다. 깨달음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보리수는 여러 사찰 경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다. 사실 부처님의 곁에 있던 보리수는 우리나라 기후에서 자생할 수 없는 ‘인도 보리수’로 염주나무로도 불리는 우리나라 보리수와는 다른 품종이다. 보리수는 여름이면 빨간 열매를 맺는 보리수나무와도 다르다. 보리수의 열매는 보리자라고 하며 이 열매로 염주를 만든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독일 슈베르트 가곡 ‘겨울 나그네’에 나오는 보리수(Linden Baum) 역시 다른 계통의 나무다. 어쩌다 이름이 죄다 보리가 되어서 이렇게나 혼란스럽다. 보리수(普提樹)의 보리(普提)는 산스크리트어 ‘보오디(bodhi)’를 음차한 불교 용어로 깨달음, 지혜를 의미한다.

염불사 보리수는 고려 말 이곳에서 불도를 닦던 스님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일원이고 게다가 살아있는 생명체라서 보배롭고 소중하다. 기록에 따르면 염불사는 보리수가 뿌리 내리기 한참 전인 고려 태조 9년(926년)에 태조 왕건과 능정스님에 의해 안흥사(安興寺)로 창건되었다. 기록이 아닌 전설은 그보다 앞선 신라 문무왕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각자 움막을 치고 수도하던 원효대사, 의상대사, 윤필거사가 일정 기간 함께 염불하던 장소가 바로 염불사였다는 이야기다. 염불사가 위치한 산은 세 사람이 수행한 산이라 해서 ‘삼성산’이라고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또 다른 설로는 고려 말 우리나라 불교를 이끈 나옹, 무학, 지공 세 스님이 정진한 산이라서 삼성산이 되었다고도 한다.

16:25 안양에술공원 버스정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