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본격 충주 관광에 나선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忠州塔坪里七層石塔 ]
정의 :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에 있는 우리나라 중앙에 건립된 통일신라의 불탑. 석탑. 국보6호.
개설 :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화강암 석재의 탑으로 통일신라시대 석탑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높다. 지리적으로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하여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불린다. 충주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교통의 요지였던 곳으로 삼국은 모두 이 지역을 전진기지로 중시해왔다.
현재의 위치가 원위치로서 주변 경작지에서는 가끔 기왓장이 출토되고, 또한 석탑 앞에는 석등하대석(石燈下臺石)으로 보이는 8각 연화대석(蓮華臺石)이 남아 있어 이 일대가 신라시대의 절터임을 짐작할 수 있으나, 이곳 유적지에 대하여 아무런 기록이 없으므로 사찰명(寺刹名)은 알 수 없다.
역사적 변천 : 중앙탑과 관련하여 전해오는 설화 가운데 통일신라 원성왕(재위 785∼798)과 관련된 설화는 탑의 건립시기와도 관련된다. 내용은 원성왕 때 신라 국토의 중앙 지점을 알아보기 위해 국토의 남북 끝 지점에서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같은 보폭을 가진 잘 걷는 사람을 정하여 출발시켰더니 항상 이곳에서 만났기에 이곳에 탑을 세우고 중앙임을 표시했다고 한다. 중앙탑면에 있는 지명 중 ‘안반내’라는 지명이 있는데 여기서 반내[半川]라고 하는 것은 남북 끝에서 반이되는 내라고 해서 반내라고 했으며 본래는 ‘한반내’였으며 이는 한국의 반, 곧 중앙을 뜻하는 것이 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1916년도의 조사에 의하면, 기단부의 일부가 파손되어 점차 기울어지고 있으며, 심할 경우 무너질 위험이 있다고 하여 다음해에 이 석탑에 대한 전면적인 해체복원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해체 도중 탑신부와 기단부에서 유물이 발견되어 현장에서 수습되었다.
탑신부의 제6층 탑신에서 기록이 있는 서류편(書類片)과 동경(銅鏡) 2점, 목제칠합(木製漆盒), 은제사리합(銀製舍利盒) 등이 나오고, 기단부에서는 청동제 뚜껑 있는 합[靑銅製有蓋盒] 등이 나왔다.
그리고 탑신부에서 발견된 은제사리합 안에는 유리로 만든 사리병(舍利甁)이 있고, 그 주변에 몇 개의 사리가 흩어져 있었으며 사리병 안에도 몇 개의 사리가 들어 있었다 한다. 이상의 유물들은 모두 같은 장소에서 출현된 것이나 그 조성연대에는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특히, 동경 2점은 고려시대의 조성품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이 석탑은 창건 이후 고려시대에 이르러 재차 사리장치의 봉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 석탑은 탑평리의 한강 중류 연안 폐사지의 높은 대지에 잘 보존되어 있다.
내용 및 특징 : 높이 14.5m인 이 석탑의 구조는 2층의 기단 위에 7층 탑신을 형성하고 그 정상에 상륜부(相輪部)를 구성한 방형중층의 일반형이다. 기단부는 10여 매의 장대석(長臺石)으로 구축한 지대석 위에 놓였는데 상층·하층의 면석(面石)과 갑석(甲石)이 모두 여러 장의 판석으로 짜여진 것은 이 석탑의 규모가 크기 때문이다.
의의와 평가 : 규모가 커서 웅장하기는 하나 기단부와 탑신부의 세부 수법에 있어서 약식(略式)과 섬약으로 흐르는 경향을 보이며, 전체적인 형태도 높이에 비하여 너비의 비례가 적어서 지나치게 고준(高峻)한 감을 주며 안정감이 적어 보인다.
석탑의 건조연대는 기단부에서의 탱주의 배치, 탑신 굄대, 탑신부 탑신과 옥개석 등의 짜임 등 각 부 양식수법으로 보아 8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탄금대(彈琴臺)
탄금대는 본래 대문산이라 부르던 야산인데, 기암절벽을 휘감아돌며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과 울창한 송림으로 경치가 매우 좋은 곳이다. 탄금대란 신라 진흥왕 때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 중 하나인 우륵(于勒)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400년 전인 신라 진흥왕 때 가야국의 우륵이라는 악사는 조국의 멸망 후에 이곳에 강제로 이주당한 수많은 가야인들 중 한사람이었다. 당시 우륵은 탄금대 절벽바위를 주거지로 삼고 풍광을 감상하면서 가야금을 타는 것으로 소일했다. 그 오묘한 음률에 젖어 들어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부락을 이루고 그곳을 탄금대라 명명했다.탄금공원 한 켠에는 충혼탑이 하나 서 있다. 한국전쟁 당시 나라를 위해 순국한 충주 출신 전몰 장병과 경찰관, 군속, 노무자 2838인의 넋을 추모하고자 1956년에 세운 것이다. 이 곳에서는 매년 6월 6일 현충일을 맞아 향사를 지낸다. 탄금정과 충혼탑 중간에는 항일시인 권태응 선생의 감자꽃 노래비가 있어 발길을 또 한번 붙잡는다. 공원 군데군데에는 조각작품이 들어서 있고, 소나무 군락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단란한 가족 나들이를 즐길 수도 있다.
지금에 와서 공원으로 말끔히 단장된 탄금대는 많은 사연을 간직한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신립장군이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한 순국의 현장이며, 현대로 넘어와서는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숨져간 넋들을 기리는 충혼탑이 세워져 있는 곳이다. 장중한 남한강 물줄기가 내려다보이는 칠금동 대문산 기슭의 탄금대.조선조로 넘어와서 임진왜란을 맞아 탄금대는 감상의 장소가 아니라 치열한 격전지로 변모한다. 신립장군의 가슴아픈 패전이 이곳에서 기록된다. 선조 25년(1592) 4월 14일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15만명의 왜군이 거침없이 서울을 향해 쳐들어가자 신립장군은 도순변사가 되어 충주 방면을 지키게 된다. 신립장군은 지형을 정찰한 뒤 조령에 진지를 확보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하고 우리 군사들의 훈련이 부족해 사지에 몰아넣지 않으면 투지를 드높일 수 없다고 판단, 28일 새벽 8천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친다. 그러나 신립 장군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천추의 한을 품고 남한강에 투신자살, 패장의 불명예를 쓰고 만다. 탄금정 정자에서 북쪽으로 층계를 따라 내려가면 열두대라는 층암절벽이 기다린다. 왜군과의 격전 당시 장군이 열두번이나 오르내리면서 활줄을 강물에 식히고 병사들을 독려했다 해서 열두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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