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국내여행

갈항사 삼층석탑(중앙박물관)(2022.04.12)

by 도화유수 2022. 4. 16.

국보99호 갈항사 동서 삼층석탑
국보99호 갈항사 동서 삼층석탑(2021.11.02)

 

카톡내용] 4월 12일(화) 4호선 이촌역에 4시쯤 만나서 국립중앙박물관 구경도 하고 저녁먹자!

[배득은] [오후 5:40] 좋아요ㅡ
[권한수(마르코)] [오후 5:59] ㅇㅋ

김천 갈항사 동서 삼층석탑

경상북도 김천의 갈항사 터 동·서쪽에 세워져 있던 것을 1916년 서울 경복궁으로 옮겨온 후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전, 개관하면서 야외에 전시중이다.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일반적인 모습이며, 서로 규모와 구조가 같다. 기단의 네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는데, 특히 가운데 기둥은 두 개씩을 두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고 있으며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의 밑면에는 5단씩의 받 침을 마련하였다. 기둥과 면석 등에는 정혈(釘穴)이 있는데 여기에는 금동판(金銅板)의 장식을 따로 부착하였던 자리로 추정된다. 두 탑은 규모는 크지는 않으나 조화로운 각부 구성을 보이며 통일신라 초기 석탑의 양식을 잘 이어받았다. 한편 동탑의 기단부에는 758년(경덕왕 17)에 탑을 세웠다는 내용이 새져 있어 제작연대를 파악할 수 있어 중요하다.

갈항사[ 葛項寺 ]

경상북도 김천시 금오산(金烏山) 서쪽에 있었던 절. 신라의 승려 승전(勝詮)이 효소왕 1년(692) 당(唐)나라에서 귀국하여 창건한 뒤, 80여 개의 돌무리를 모아 놓고 ≪화엄경(華嚴經)≫을 강의하였는데, 후에 이 돌들은 많은 영험을 보였다고 함. 경덕왕 17년(758)에는 남매 사이였던 영묘사(零妙寺)의 언적(言寂)과 문황태후(文皇太后), 경신태왕(敬信太王)이 3층 석탑을 건립. 절 터에 남아 있던 석탑 2기 가운데 동탑(東塔)에는 이두문으로 된 명기(銘記)가 음각되어 있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음.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

758년 아름다운 비례를 지닌 쌍탑이 김천 갈항사(葛項寺)의 경내에 세워졌습니다. 발원자는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의 어머니인 계오부인(繼烏夫人) 박씨(朴氏)와 그녀의 오라버니, 그리고 그녀의 여동생이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간절한 염원을 담아 탑을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건탑 후 27여년의 시간이 흐른 뒤 계오부인은 황태후가 되었고 그 이후 발원자였던 세 사람은 탑에 기록되었습니다.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 통일신라 758년, 높이 4.3 m, 국보 99호

석가탑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비례미

신라의 삼국통일은 석탑의 모습에도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기존 신라와 백제로 대표되던 각기 다른 양식의 석탑이 하나의 모습으로 재창조되었습니다. 7세기 말 경, 경주의 감은사(感恩寺)와 고선사(高仙寺)에 세워진 삼층석탑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탑들은 마치 통일 왕조의 권위와 위용을 상징하는 듯, 안정적이면서도 압도하는 웅장함이 돋보입니다. 초층 탑신석 상단 중앙까지는 밑변이 긴 삼각형 구도로 안정감을 더하였고 층간의 높이와 지붕의 비례를 일정하게 체감시켜서 그러한 시각적 효과를 보이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 초기 석탑의 안정감과 웅장함은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빠르게 발전과 변화를 거듭하면서 비례의 경향이 세장(細長)함으로 바뀌게 됩니다. 탑의 규모는 축소되었고, 돌들을 결합하고 쌓는 방식도 규칙화·효율화되었으며, 밑변이 길었던 삼각형 구도 역시 밑변이 점차 좁아지는 구도로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8세기 중엽에 이르면 하부의 정삼각형 구도와 절묘한 체감율이 적용된 신라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석탑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석가탑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비례를 가진 석탑들은 경주를 비롯하여 지방에서도 유행하였습니다.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이 결실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석가탑에 버금가는 비례적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8세기 중엽에 유행했던 그 비례가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탑 표면의 수많은 못 구멍[釘穴]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에는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석가탑이나 그보다 이전 시기에 제작된 일반형 석탑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탑 표면 전체에서 못 구멍이 관찰된다는 점입니다.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 남면의 표면 못 구멍 배열

일반형 석탑이 출현한 7세기 말에서 비례적 완성이 이루어진 8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석탑의 표면에 못 구멍을 뚫는 경우는 옥개석 모서리에 풍탁을 달기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쓰이지 않는 기법이었습니다. 물론,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고선사지 삼층석탑의 초층 탑신석에서 이러한 모습이 처음 나타났으나 유행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현존하는 예가 남아있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지만 금동판 등을 탑에 부착하기 위해 뚫은 못 구멍이었을 것이라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갈항사에 세워졌던 두 탑에는 무슨 이유로 이미 사라진지 오래된 이와 같은 기법이 그것도 지방에서 신성처럼 나타나게 된 것일까요?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의 기단부 부재 배열 방식 및 각 부재 간의 비례 등을 분석해 보면, 758년에 건립했다는 명문 기록을 신뢰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못 구멍에 대한 문제는 기존과는 다른 측면에서 새롭게 접근해야 합니다.

경주에서는 고선사지 삼층석탑을 제외하면 유사한 못 구멍 표현을 보이는 예가 유일하게 1건 확인됩니다. 경주 반월성 인근에 위치한 전 인용사지 동·서 삼층석탑이 그것입니다. 8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쌍탑은 도괴된 채로 오랜 시간이 흘러 부재들의 유실이 많은 편이지만 옥개석과 초층 탑신석에 뚫려 있는 못 구멍을 뚜렷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옥개석의 못 구멍은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의 그것과 배열의 차이는 있으나 가장자리를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뚫은 점은 동일한 장엄 의사를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 인용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표면 장엄의 발전 단계라는 측면으로 접근해 볼 때, 고선사지 삼층석탑과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 사이의 공백을 메워줄 수 있는 중간 단계의 유물로 보입니다.

그러나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과 전 인용사지 동·서 삼층석탑의 제작 시기는 위의 현상과는 상반됩니다. 이 문제는 명문이 새겨진 시점과 그 배경에 관심을 가지게끔 해줍니다. 동탑의 기단부에 새겨진 명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갈항사지 동 삼층석탑 기단부 명문

“두 탑은 天寶 17년(758)년 오라비와 언니, 여동생 삼인의 업으로 완성하였다. 오라비는 경주 영묘사의 언적법사이고 언니는 소문황태후이며, 여동생은 경신태왕의 이모이다.”

(“二塔天寶十七年戊戌中立在之 娚姉妹三人業以成在之 娚者零妙寺言寂法師在 姉者照文皇太后君妳在 妹者敬信太王妳在也”)

경신태왕(敬信太王)과 소문황태후(昭文皇太后)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도 확인되는 인물로서 원성왕(元聖王)과 그의 어머니를 각각 지칭합니다. 이 명문이 중요한 이유는 그를 왕이라고 기록한 점, 시호(諡號)를 사용하지 않고 경신(敬信)이란 휘(諱)를 사용한 점 등을 보아 원성왕의 치세기인 785년에서 798년 사이에 새겨진 것임을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체 왜 건립 당시가 아닌 원성왕의 재위기간 중 왕과의 관계까지 언급하면서 발원자들을 탑에 새긴 것일까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경신(敬信)이 왕이 된 후 그의 외척들은 그들의 원찰이었던 갈항사에 이를 기념하기 위한 추가 불사(佛事)를 진행한 것 같습니다. 불사의 규모는 알 수 없으나 탑에 보이는 못 구멍과 명문이 그러한 숨겨진 사정을 이야기 해주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결국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의 독특한 특징이었던 못 구멍들은 건립 당시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원성왕의 재위기간 중 표면 장엄을 위해 새롭게 뚫은 것이고, 그러한 장엄 기법은 신라 왕성 바로 인근에 세워져 있었던 전 인용사지 동·서 삼층석탑을 모델로 삼은 것이라고 해석해 본다면 지금까지 양식사적으로 의문시되어 왔던 문제가 자연스레 해결됩니다.

갈항사지 동삼층석탑 초층 탑신부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초층 탑신석의 중앙부가 거칠게 면 처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보통 이러한 흔적들은 노출되지 않는 부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특징으로써 초층 탑신석 중앙부를 이와 같이 처리하였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