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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원과 동작구

지덕사를 찾아서(2022.03.30)

by 도화유수 2022. 3. 31.

양녕대군의 사당 지덕사
대군묘
사극중에 정향 치마폭에 팔난시를 적는 장면

 

양녕대군 이제 묘역[讓寧大君李禔墓域]

서울특별시 동작구에 있는 조선전기 제3대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의 사당과 묘소. 시도유형문화재.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1호. 관악산의 지맥인 국사봉 북쪽 기슭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에 위치해 있다.

묘역은 11,888평에 건평 9평인 사당을 비롯한 3동의 건물과 묘 1기로 구성되어 있다. 1972년 8월 30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고, 재단법인 지덕사(至德祠)에서 관리하고 있다.

지덕사는 앞툇마루가 놓인 3칸의 사당을 중심으로 전면 마당 좌우측에 제사당 서고 및 제기고를 두었다. 마당 전면에는 삼문을 두고 담장을 둘러 외부와 구분하고 있다.

사당의 뒤편에 양녕대군과 정경부인 광산 김씨(光山金氏)를 합장한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봉분 앞에는 장명등과 묘비 및 문인석이 좌우에 2기씩 서 있다. 양녕대군은 유언으로 호화로운 예장을 받지 말고 묘비와 상석을 만들지 말라 했는데 7대손 김만(金曼)과 8대손 김성항(金性恒)이 묘소 앞에 석물을 세웠다 한다.

하지만 그 때 세운 묘비가 1910년 경술국치 전날인 8월 28일 밤 난데없이 벼락소리와 함께 갈라졌다고 한다. 현재의 묘비는 1915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사당 안에는 세조 어제(御製)의 금자현액(金字懸額), 허목(許穆)의 지덕사기(至德祠記), 정조 어제 지덕사기, 양녕대군이 친필로 쓴 소동파(蘇東坡)의 후적벽부(後赤壁賦)·팔곡병풍 목각판 및 대군의 필적인 숭례문(崇禮門) 탑본 등이 보관되어 있다.

지덕사는 1675년(숙종 1) 양녕대군의 외손인 우의정 허목의 건의로 남대문 밖 서부 도저동에 세웠다. 이 때 건축된 지덕사는 남관왕묘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현재 서울시 용산구 후암동 일대다. 다음해 건물이 완성되어 지덕사라 이름하고 사적을 지어 현판을 써서 걸었다.

지덕이란 이름은『논어』권8 태백편(太白篇)의 “태백은 지덕이다.”고 칭한 공자의 말에서 유래되었다. 이 고사는 주나라 대왕 때에 상(商)이 약해지고 주가 날로 강해질 때의 일이다.

대왕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다. 대왕은 셋째 계력(季歷)에게 왕위를 계승시켜 천하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장자 태백과 차자 우중(虞中)이 형만(荊蠻)의 땅으로 몸을 숨겨 계력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하였다.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동생 충녕대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자 방탕과 탁불(托佛)한 것을 고사와 비교해서 양녕의 행동을 태백의 지덕으로 명명한 것이다.

1757년(영조 33) 영조는 양녕의 후손인 이지광(李趾光)을 불러 초임직을 주고 퇴락한 사당을 보수하게 했으며, 직접 제문을 짓고 치제하였다. 1789년(정조 13) 정조는 사액했고, 직접 지덕사기를 지어 현판에 써서 걸도록 하였다. 1918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장 및 이건하였다.

 

 

3월 30일 동작구 영화초등학교에서 일정을 마치고 접근성이 좋은 지덕사를 방문한다. 입구에서부터 좋은 글귀가 눈에 띈다.

유구무강(悠久無疆) : 확연한 진리는 유구하고 끝이 없어라

숭조돈종(崇祖敦宗) : 조상을 기리고 종족(일가)과 화목함.

만사여의 (萬事如意) : 세상 모든 일이 뜻대로 됨.

지덕사 정문인 양명문
양명문 안쪽 모습
대군묘

 

숭 례 문(崇禮門)  지덕사 소장 탁본

숭례문 현판은 임진왜란 때 유실되었는데 광해군때 청파동 배다리밑 도랑에서 밤마다 서광이 비쳐 팟더니 숭례문현판이 뭍혀 있었다고 구전 되고 있습니다. 2008년 숭례문 화재로 현판 일부가 훼손 되었을때 양녕대군의 사당인 이곳 지덕사에 소장되어 있는 탁본자료를 근거로 복원했다고 하네요 국보1호 숭례문은 한강건너 관악산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관악산을 풍수로 보면 화기(火氣) 가 매우 강한 산이 라고 하여 이에 불의 기운이 도성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특별히 "숭례문" 현판을 종서(縱書 아래로쓰기)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불이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모양인 동시에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형상" 이므로 현판을 아래로 쓰면 불의기운을 막을 수 있다는 믿음 에서 였습니다

 

 

 

 

         묘향산 암자에서 지은 시

                                       - 양녕대군(讓寧大君)

산하조작반(山霞朝作飯) 산 노을은 아침에 밥을 지어주고

나월야위등(蘿月夜爲燈) 담쟁이 사이 달빛은 밤에 등불이 되어주고

독유고암하(獨有孤菴下) 외로운 암자 밑에 홀로 있노라니

유존탑일층(惟存塔一層) 오직 한 층의 탑만이 여기 있구나

   *蘿 담쟁이덩굴

*도광(韜光): 학식이나 재능을 감추고 남에게 드러나지 않음,

*도광재(韜光齋): 동생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도광을 했다고 하여 양녕대군의 재실을 도광재라 함.

양녕대군의 재실 도광재
수비약사(竪碑略史): 1910년 벼락으로 망가진 묘비를 1915년에 복원해 세웠다는 내용

치마에 적은 사랑

세종대왕의 큰형인 양녕대군이 평안도 나들이를 했다. 평양이 어디인가. 평양감사도 제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 재색을 겸비한 관기가 즐비한 색향(色香)이다. 그래서 세종은 형인 양녕대군에게 ‘제발 여색을 조심하라’는 당부를 하게 된다.

그러나 역시 그곳에서 만난 기생 정향(丁香)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헤어짐이 못내 아쉬웠던 양녕대군이 정향의 비단 치마폭에 이별의 정표로 시 한 수를 남긴다. '나는 머물기 어렵고, 너는 보내기 어렵구나(我留難 爾送難)'라는 내용의 팔난시(八難詩)다. 이처럼 이름난 문사나 한량이 치마폭에 시나 그림을 남겼다는 이야기가 종종 전해지지만 평양기생 정향(丁香)과 이별할 때 비단치마폭에 써준 <팔난시(八難時)는 최근까지 550년 긴 세월동안 사람들 입으로 퍼져 오르내린 운치어린 명시로 전해지고 있다.

 

                八難詩(팔난시)

難難爾 難我難하고,(난난이 난아난)

어렵고 어렵도다 너도 어렵고, 나도 어렵도다.

我留難爾送難이로다.(아류난 이송난)

나는 머물기 어렵고, 너는 보내기 어렵도다.

南向爾隨難 北方我別難이라.(남향이수난 북방아별난)

너는 남쪽으로 따라가기 어렵고, 나는 북방을 떠나기 어렵다.

塞外書寄難 空山夢尋難이로다.(새외서기난 공산몽심난)

길이멀어 글로서 소식전하기 어렵고, 명월공산 꿈속에서 서로 만나기 어렵도다.

長思念一忘難 一杯訣此酒難이라.(장사념일망난 일배결차주난)

오랫동안 사모하던 생각을 단번에 잊기 어렵고, 이 한잔술로 결별하기가 어렵도다.

爾能琪歌聲不咽難하고,(이능기가성 불인난)

너의 옥같은 노래소리 목메지 않기 어렵고.

我能禁泣 眼無淚難이로다.(아능금읍 안무누난)

나는 울음을 참을수 있지만 눈물 글썽이지 않기 어렵도다.

誰云 蜀道上天難이련가! (수운촉도 상천난)

누가 말했던가! 촉나라 길에서 하늘을 보기가 어렵다고,

不如今日 一時難이니 又難이로다.(불여금일 일시난 우난)

오늘 이 순간의 어려움만 같지 않을것이니 매우 어렵도다.

 

그날 그렇게 헤어진 양녕대군은 임금과 약속한 기일을 지키기 위해 평양 북쪽의 몇 고을을 대충 돌아보고 허둥지둥 서울로 돌아왔다. 그날 세종임금이 남대문 누락에 주안상을 차려놓고 형님인 양녕대군을 맞았다.

"이번 관서지방을 다녀오시는 길에 왕실을 부끄럽게 한 일은 없으시겠지요?"

양녕대군이 답변을 하기도 전에 곧바로 풍악이 울려 퍼졌고, 병풍 뒤에서 아리따운 여인이 나와서 춤을 추는데, 바로 소복을 했던 그 여인의 치마폭에선 그가 써주었던 <팔난시>가 펄럭이고 있었다. 양녕대군이 임금 앞에 넙죽 엎드리고 말했다.

"상감 너그럽게 용서하소서."

세종임금은 양녕대군의 부끄러워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이 마냥 즐거워하면서 술을 마셨고, 양녕대군 역시 덩다라 취했다. 임금의 명을 받은 평양감사가 평양의 이름난 기생은 정향에게 소복을 하게 한 뒤 양녕대군의 눈에 뜨이도록 한 것이었다. 양녕대군과 정향의 아름다운 사랑을 전해들은 임금이 평양에서 정향을 불러 들여 평생 동안 함께 하도록 설득한 것이었다. 정향의 치마폭에 아름다운 이야기를 써 내려간 양녕대군의 글씨가 바로 불에 타서 사라진 숭례문 현판 글씨였다. 돈 때문에 혹은 권력 때문에 형제간에도 소송을 벌이고 칼부림을 하며 싸우는 시대에 세종 금과 그의 큰 형인 양녕대군의 우애가 그리도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