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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국내여행

창덕궁과 후원2후원(2021.06.29)

by 도화유수 2021. 7. 1.

부용지와 주합루

창덕궁과 후원 昌德宮 後苑

자연 지형을 살려 만든 왕실의 휴식처

태종이 창덕궁을 창건 할 당시 조성한 후원은 성종 대에 건립된 창경궁까지 그 영역이 확장되었다. 이들 궁궐이 다른 궁궐보다 특히 왕실의 사랑을 많이 받은 것은 넓고 아름다운 후원 때문일 것이다. 임진왜란 때 대부분 건물이 불타고 후원이 훼손되어 광해군이 창덕궁과 함께 1610년(광해2)에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 후 인조, 숙종, 정조, 순조 등 여러 왕들이 개수하고 증축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창덕궁 후원은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마다 아름다운 정자를 만들었다. 약간의 인위적인 손질을 더해 자연을 더 아름답게 완성한 절묘한 솜씨이다.

4개의 골짜기에는 각각 부용지(芙蓉池), 애련지(愛蓮池), 관람지(觀纜池), 옥류천(玉流川) 영역이 펼쳐진다. 창덕궁 후원으로 들어갈수록 크고 개방된 곳에서 작고 깊숙한 곳으로, 인공적인 곳에서 자연적인 곳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하여 뒷산 응봉으로 이어진다. 서쪽 깊숙한 숲 속에 대보단이나 신 선원전 같은 제사 시설이 있는 신성한 곳이다. 세계 대부분의 궁궐 정원은 보고 즐기기 위한 관람용이어서 한눈에 볼 수 있는 장대한 경관이 펼쳐진다. 이에 비해 창덕궁 후원은 작은 연못과 정자를 찾아 여러 능선과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온몸으로 체험해야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연꽃 향기 머금은 신선의 세상, 창덕궁 부용정

부용정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덕궁 내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이다. 보물 제1763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래 숙종이 1707년(숙종 33)에 지은 택수재(澤水齋)를 1793년(정조 17)에 정조가 고쳐 지으면서 부용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부용정이 있는 부용지 주변은 창덕궁 후원에서도 가장 넓고 짜임새 있게 구조가 갖추어진 아름다운 휴식 공간이다.

부용정(芙蓉亭)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번지 창덕궁 내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이다. 보물 제1763호로 지정되어 있다. 창덕궁의 동궁이 있던 곳에서부터 시멘트 길을 따라 언덕을 넘어가면 네모난 호수와 함께 먼발치에 주합루(宙合樓)와 규장각(奎章閣), 그리고 영화당(暎花堂)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호수 가에 도착하면 남쪽으로 비록 주합루보다는 작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전혀 위축됨이 없이 도도하게 자리하고 있는 정자가 보인다. 이 건물이 부용정이고, 그 앞에 있는 호수가 부용지(芙蓉池)다.

『궁궐지(宮闕志)』에 의하면 부용정은 1707년(숙종 33)에 지은 택수재(澤水齋)를 정조가 고쳐 지으면서 부용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연못 안에 채색하고 비단 돛을 단 배가 있어 정조 임금께서 꽃을 감상하고 고기를 낚던 곳‘이라고 하였다.

정조가 부용정을 고쳐 지은 것은 1793년(정조 17)이다. 이때 정조는 직접 상량문을 지어 이를 기념하였다. 그가 지은 상량문은 『홍재전서(弘齋全書)』 제55권에 전한다. 상량문에는 정조가 왜, 어떤 목적에서 부용정을 지었는지 잘 나타나 있다. 정조는 창덕궁 후원의 아름다운 경치에 비해 숙종 때 지은 택수재가 낡고 기울어졌을 뿐 아니라 일부가 허물어져 주위 경관과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정자를 새로 짓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 과정에서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검소하고 소박한 규모로 하되 신선이 살았다고 하는 중국 정원에 비추어 손색이 없도록 연꽃을 심어 군자의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였다. 나아가 건물이 주위의 자연환경과 잘 어울리도록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살리되 외형적 규모를 『주역』의 대장괘를 취하도록 하여 나라가 왕성하고 굳건한 기운을 갖기를 희망하였다. 또한 정자의 내부로 드나드는 방과 마루에 가인괘를 취한 것은 가정의 평화와 윤리를 바로 세우기 위함이다. 상량문에서 보듯이 부용정은 정조의 국가 운영 철학과 풍류의 뜻이 동시에 담겨 있는 건물이다.

정조는 부용정 건물을 완공하고 난 후 1795년(정조 19) 3월 이곳에서 대대적인 연회를 베풀었다. 이 해는 정치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마음의 고통을 간직해 왔던 그가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화성에 다녀온 해이다. 그는 어머니에 대한 일말의 부담을 덜어낸 듯 너무 기쁘고 즐거운 나머지 ‘올해야말로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경사스러운 해이다.’라며 창덕궁 후원에서 규장각 신하들과 함께 54명이 모여 잔치를 베풀었다.

이 연회에 참여한 사람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다. 정약용이 정조의 총애를 받아 규장각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있을 때의 일이며, 다산은 정조의 명을 받고 연회에 참석하였다. 그는 이 연회에 참석한 것을 매우 황공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문집에 「부용정시연기(芙蓉亭侍宴記)」라는 글을 남겼다.

창덕궁 부용정 전경

위의 정조와 정약용이 남긴 글을 종합하면 어머니의 회갑연을 마친 뒤 기분이 홀가분해진 정조가 자신의 정국 운영에 도움을 준 신하들을 불러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부용지에 둘러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기를 잡고, 고기를 낚을 때마다 한 쪽에서는 음악을 연주하고, 연못에 배를 띄워 즉흥적으로 시를 짓되 시를 짓지 못하면 작은 섬에 가두어 귀양을 보내는 퍼포먼스도 연출하였다. 물론 잡은 물고기나 섬에 가둔 사람들은 나중에 모두 풀어주었기 때문에 목적이 고기를 낚거나 사람을 핍박하고자 하는 데 있었던 것은 아니다. 모두가 왕과 신하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이른바 소통을 나누는 계기로 삼았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정조가 누정의 이름을 부용정이라 한 것은 연꽃에서 따온 것이다. 중욱 후한(後漢)의 학자 허신(許愼)은 ‘활짝 핀 연꽃은 부용이라 하고, 피지 않은 연꽃을 함담(菡萏)이라 한다.’고 하였다. 부용지 주변은 창덕궁 후원에서도 가장 넓고 짜임새 있게 구조가 갖추어진 아름다운 휴식 공간이다.

부용정 건물의 평면은 ‘정(丁)’자와 ‘아(亞)’자가 교묘하게 결합된 형태이다. 사방 어느 곳에서 보아도 문들이 서로 마주 보이는 형태로 만들었다. 하늘에서 바라보면 지붕이 ‘십(十)’자 모양으로 보여 네 방향이 모두 같다. 물론 지붕의 형태도 모두 팔작지붕으로 지었다. 방 주위에는 난간을 둘렀으며, 따뜻한 방과 시원한 누마루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중에서도 기둥 두 개를 물에 담그고 있는 부분의 난간은 일반 난간보다 약간 높다. 물론 왕이 앉는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처마 곡선은 물을 박차고 오르는 물새의 날개 같이 날렵하게 위로 향하고 있다. 누마루에 앉아서 바라보는 부용지와 어수문(魚水門), 그리고 주합루의 모습은 그야말로 절경이다. 정조가 누마루에 앉아 연회를 즐기는 모습을 상상하면 나도 모르게 흥에 겨워 절로 어깨춤이 추어지는 기분이다.

정조가 상량문을 쓰면서 함께 남긴 시가 있다. 대들보를 위와 아래, 동서남북으로 들어 올리는 것을 운으로 삼아 지은 이 시에는 나라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정조의 마음이 담겨 있다.

한편 부용정에는 다른 궁궐의 누정과 마찬가지로 주련(柱聯)들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들 주련에는 그 누정이 추구하고자 하던 이상이 담겨 있다. 부용정 건물 기둥마다 걸린 주련의 시구는 부용지 일원을 여러 신선이 살고 있는 불국토의 세계로 묘사하고 있다. 돌계단이 있는 부용정 입구 오른쪽 기둥부터 시계방향으로 걸린 주련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천 떨기 고운 빛깔 아리땁게 흐르는 저녁 노을[千叢艶色霞流彩]

십 리의 맑은 향기 사향노루의 열린 배꼽[十里淸香麝裂臍]

낭원(閬苑)의 여러 신선들 푸른 일산을 펼쳐든 듯[閬苑列仙張翠蓋]

대라(大羅)의 많은 부처들 향성(香城)을 에워싼 듯[大羅千佛擁香城]

푸르고 붉은 빛이 거울 같이 맑은 물 속에 어우러지고[翠丹交暎臨明鏡]

꽃과 잎 모두 향기를 품어 아름다운 발에 스며드네[花葉俱香透畵簾]

해맑은 꽃잎 삼천 궁녀의 불그레한 볼이요[晴萼三千宮臉醉]

연잎에 구르는 빗방울 오백 부처의 둥근 염주라네[雨荷五百佛珠圓]

거북이와 물고기가 가을 물속에 한가로이 헤엄치고[龜戱魚游秋水裏]

초가을 서늘한 때 이슬 짙고 바람 좋도다[露繁風善早凉時]

부용지에 피어난 연꽃 향기가 사향처럼 십 리에 걸쳐 퍼지는 가운데 연꽃의 맑고 깨끗한 모습은 부처님의 상을 나타내고, 넓은 잎은 신선들의 우산이 되며, 연꽃은 삼천의 궁녀요, 연꽃 잎 위에 구르는 빗방울은 염주가 된다고 하였다. 거북이와 물고기가 유유히 헤엄치는 연못은 무한한 평화로움을 상징하는 세계다. 주련의 내용만으로도 이 일대는 탈속적이면서도 자유롭고 낭만적인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https://ncms.nculture.org/pavilion/story/2389

부용정과 뒤에 사정지비각이 보인다.

애련지(愛蓮池)와 의두합(倚斗閤)

군자의 성품을 닮은 경치

1692년(숙종18)에 연못 가운데 섬을 쌓고 정자를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 그 섬은 없고 정자는 연못 북족 끝에 걸쳐 있다. 연꽃을 특히 좋아했던 숙종이 이 정자에 ‘애련(愛蓮)’이라는 이름을 붙여, 연못은 애련지가 되었다. 숙종은 ‘내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새 정자의 이름을 지은 까닭을 밝혀 놓았다. 애련지 서쪽 연경당 사이에 또 하나의 연못이 있는데, 원래 이곳에 어수당이라는 건물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없어졌다. 1827년(순조27) 효명세자는 애련지 남쪽에 의두합을 비롯한 몇 개의 건물을 짓고 담장을 쌓았다. 현재 ‘기오헌(奇傲軒)’이라는 현판이 붙은 의두합은 8칸의 단출한 서재로 단청도 없는 소박한 건물이다. 바로 옆의 운경거(韻磬居)로 추정되는 건물은 궐 안에서 가장 작은 한 칸 반짜리 건물이다.

奇 기이할 기 傲 거만할 오 韻 운 운 磬 경쇠 경

Tip] 인조반정과 어수당 : 지금은 사라진 어수당과 관련한 일화가 있다. 1623년 인조반정 당시 광해군의 비 유씨는 반정의 낌새를 알아차리고 궁녀들과 함께 밤에 몰래 어수당에 들어가 숨어 있었다. 이틀이 지나도록 밖에서 아무런 소식이 없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한 유씨는 보향이라는 궁녀를 시켜 자신이 여기에 있음을 알렸다. 보향이 반군 대장에게 “이 일이 의거라고 하면서 어찌 전왕의 비를 굶겨 죽이려 하오?”라고 하자. 대장이 이를 인조에게 보고하여 유씨에게 음식을 후하게 차려 주었다고 한다

연경당(演慶堂)(보물:1770호)과 선향재(善香齋)

사대부 살림집을 본뜬 조선 후기 접견실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의례를 행하기 위해 1828년(순조 28)경에 창건했다. 지금의 연경당은 고종이 1865년쯤에 새로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사대부 살림집을 본떠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단청을 하지 않았다.

사랑채와 안채가 분리되어 있지만 내부는 연결되어있는 점도 유사하다. 그러나 일반 민가가 99칸으로 규모가 제한된 데 비해, 연경당은 120여 칸이어서 차이가 난다. 서재인 선향재(善香齋)는 청나라풍 벽돌을 사용하였고 동판을 씌운 지붕에 도르래식 차양을 설치하여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 후원 높은 곳에 있는 농수정(濃繡亭)은 마치 매가 날개를 편 것같이 날렵한 모습이다. 안채 뒤편에는 음식을 준비하던 반빗간이 있다. 고종 이후 연경당은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고 연회를 베푸는 등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연경당은 2012년 보물제 1770호로 지정되었다.

존덕정(尊德亭)과 폄우사

이 일대는 후원 가운데 가장 늦게 갖춰진 것으로 보인다. 원래 모습은 네모나거나 둥근 3개의 작은 연못들이 있었는데, 1900년대 이후 하나의 곡선형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관람지라고 부른다. 연못을 중심으로 겹지붕의 육각형 정자인 존덕정, 부채꼴 형태의 관람정(觀纜亭), 서쪽 언덕 위에 위치한 길쭉한 맞배지붕의 폄우사(砭愚榭), 관람정 맞은편의 승재정(勝在亭) 등 다양한 형태의 정자들을 세웠다. 폄우사는 원래 부속채가 딸린 ‘ㄱ’자 모양이었으나 지금은 부속채가 없어져 단출한 모습이고, 숲 속에 자리 잡은 승재정은 사모지붕의 날렵한 모습이다. 1644년(인조 22)에 세워진 존덕정이 가장 오래된 건물이고, 관람정과 승재정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옥류천(玉流川) 일원

옥류천은 후원 북쪽 가장 깊은 골짜기에 흐른다. 1636년(인조 14)에 거대한 바위인 소요암을 깎아 내고 그 위에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어들여 작은 폭포를 만들었으며, 곡선형의 수로를 따라서 흐르는 물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벌이기도 했다. 바위에 새겨진 '玉流川' 세 글자는 인조의 친필이고, 오언절구 시는 이 일대의 경치를 읊은 숙종의 작품이다.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농산정(籠山亭), 취한정(翠寒亭), 청의정(淸漪亭) 등 작은 규모의 정자를 곳곳에 세워, 어느 한 곳에 집중되지 않고 여러 방향으로 분산되는 정원을 이루었다. 작은 논을 끼고 있는 청의정(淸漪亭)은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초가이다. <동궐도>에는 16채의 초가가 보이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청의정만 궁궐 안의 유일한 초가로 남아 있다.

후원의 깊은 곳에서 발원한 옥류천(玉流川)은 소요암(逍遙巖)에서 옥류천(玉流泉)을 이루며, 소요암이 보이는 곳에 소요정(逍遙亭)이 세워져 있다. 초가지붕을 인 청의정(淸漪亭)과 소요정 사이에 인조가 팠다고 전해지는 어정(御井)이 있으며, 어정의 샘물을 마시고 돌아가는 왕이 쉬도록 취한정(翠寒亭)을 세웠다. 옥류천 주위에는 후원 내에서 유일하게 높은 기단 위에 지어진 태극정(太極亭)이 있는데, 소요정·청의정·태극정을 한데 묶어 상림삼정(上林三亭)이라 칭한다. 행랑채와 같이 건립된 농산정(籠山亭), 존덕지에서 옥류천으로 가는 길에 지어진 취규정(聚奎亭)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