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의 석조전과 중화전>
오늘의 2번째 궁궐 나들이는 덕수궁이다 그러나 아래 지도와 같이 경희긍입구에서 덕수궁 돌담길을 돌아 먼저 환구단을 찾는다.
덕수초등학교를 지나 구세군 본부를 지난다.
덕수궁에서 아관파천때 고종이 간 길 <고종의 길>
덕수궁 돌담길이다.
환구단(圜丘壇)
1. 개요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 웨스틴 조선호텔 앞에 위치해 있는 대한제국의 제단(祭壇). 원구단(圜丘壇, 圓丘壇)이라고도 불린다. 원래는 거대한 규모를 가진 대한제국의 성역(聖域)으로 지정되었던 곳이었으나 일제가 1913년에 호텔 신축을 이유로 철거하게 되면서 환구단 본단(本壇)은 사실상 없어지고 대신 환구단의 상징물격인 '황궁우(皇穹宇)' 만 남게 되었으며 규모도 대거 축소되었다.
환구단은 중국의 황제가 유교의 예법에 따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장소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자국 이외의 국가들은 모두 오랑캐로 보며 오직 자국 군주만이 환구단을 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우리나라같이 유교를 수용하고 외왕내제의 성격을 가진 나라들은 모두 환구단을 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우리나라는 중국에서 유교가 전래되기 전에도 다양한 종류의 하늘에 지내는 제사가 있었다. 부여, 고구려, 백제 등 여러 왕조에서 "동맹", "수신", "영고" 등의 이름으로 불려진 제사들로 하늘에 제사지내고 오방의 신, 각국의 건국자들에게 제사지냈다. 신라의 신궁 역시 제사지낸 상대가 정확히 누구인지 논란이 있지만 황궁우와 유사한 천원지방을 묘사한 팔각형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천신 숭배 시설이 아니었을까 하는 설도 있다. 시간이 흘러서 유, 도, 불교가 전파되어 전통문화와 융합하면서 도교식 제사인 초제나 불교식 행사 겸 제사인 팔관회, 연등회 등이 등장하고 불교의 천신인 제석천을 주존으로 모신 절인 제석원/제석사를 짓기도 했다. 특히 유교가 전파되면서 유교식 제사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젔고 환구단, 종묘, 사직이 우리나라에 설치된다.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중국식 환구단은 고려 성종 때 최초로 지어졌다. 하늘의 신 "상제"와 오방의 신, 그리고 태조 왕건에게 제사지내며 기우제를 지냈다. 국왕이 즉위할 때, 왕태자를 책봉할 때도 종묘와 환구단에 제사지내 하늘과 건국자에게 이 소식을 고하였다.
원나라와의 전쟁에서 굴복한 후, 원나라 간섭기에 들어서며 원구단은 폐지되고 제석 신앙도 위축되었으나 공민왕 때 다시 부활한다.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 왕조가 건국된 후 태조 이성계는 환구단 폐지를 요청하는 유학자들의 상소를 거부하고 환구단을 "원단"으로 이름만 바꾸어 계속 시행한다. 이후 환구단은 태종대에 폐지됐다가 세조대에 잠시 부활하나 다시 폐지된다. 이 때부터는 소격서의 초제와 마니산 참성단의 단군제를 올릴 때 옥황상제 위패를 놓아 눈 가리고 아웅식 천제를 지냈으나 소격서는 이단인 도교의 제사라며 유학자들에게 지속적으로 공격받다 임진왜란을 거치며 완전히 사라졌고, 참성단 제사도 비록 단군을 기린다는 유교적 효 이념을 내세워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면했지만 역시 잦은 공격을 당했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1897년에 경운궁으로 환궁(還宮)하면서 본래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던 중국풍 별관인 "남별궁"을 부수고 그 자리에 몇백년 만에 다시 환구단을 짓는다.[6]
1897년(광무 원년) 고종은 이 곳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낸 후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게 되고, 이 때부터 환구단은 대한제국의 자주 독립과 국가 평안을 기원하는 신성한 장소로 부상하게 된다. 대한제국은 기본적으로 동지(冬至)와 새해 첫날(음력 설날)에 제천(祭天) 의식을 거행하였다.
1899년에 환구단 내에 '황궁우(皇穹宇)' 를 설치하여 안에 신위판(神位版)을 봉안하였고 1902년에는 고종 황제 즉위 40년을 맞이하여 '석고단(石鼓壇)' 을 설치하였다.
2. 일제의 환구단 철거 및 구역 축소
그러나 1910년 8월에 한일병합이 체결된 후 1913년 일제가 환구단 자리에 '조선철도호텔'을 신축한다는 조선총독부의 훈령에 따라 환구단은 결국 일제에 의해 철거됐고, 황궁우와 석고단만 남긴 채 영역도 축소되었다.
환구단이 철거된 자리에 조선철도호텔이 들어섰는데, 이 호텔은 해방 후인 1968년 현재의 웨스틴 조선호텔로 이어 나가게 된다.
3. 해방 후
1945년 해방 이후에도 환구단은 제단(祭壇) 자체를 복원하지 못한 채 황궁우와 석고단을 중심으로 그 흔적을 그대로 이어나가게 되었으며, 이후 서울 도심의 발달과 도로공사 등을 거쳐 오늘까지 지금의 모습을 이어 오게 되었다.
환구단은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연중무휴로 무료 개방된다.
신령의 위패를 모신 황궁우 내부는 구에서 운영하는 문화유산탐방 및 생태체험 프로그램을 이용해야 볼 수 있다.
지리적으로 웨스틴 조선호텔 앞에 위치해 있던 탓에 처음 방문을 했던 내외국인들이나 환구단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사람들로부터는 조선호텔의 정원이나 부속물이 아니냐는 의문이 나돌게 될 정도로 문화재라기보다는 조선호텔의 부속물이 아닌가 하는 평판들도 있었다.
웨스틴 조선호텔 앞에 위치해 있기는 하지만, 엄연한 국가 문화재이자 보호시설이기 때문에 문화체육관광부 또는 문화재청과 서울특별시 등에서 관리감독하고 있으므로 신세계조선호텔은 사실상 이에 대한 관리 권한이 없다.
일각에서는 아예 웨스틴 조선호텔을 이전하거나 황궁우를 옮겨 역사적 고증을 통해서 환구단 본단(本壇)을 복원하자고 촉구하기도 하였다.
환구단 철거 이후에 환구단의 정문인 '환구대문' 또한 흔적도 없이 철거된 줄 알았지만 2007년 서울 강북구 우이동 삼양교통 차고지 앞에 있는 '그린파크호텔'에서 발견되었고, 이런 영문을 모른 채 호텔측에서 아예 환구단 정문을 시내버스 출입구로 사용했다고 한다. 발견되었을 당시 현판은 존재하지 않았고 '백운문'이라는 현판이 대신했는데 건축 방식을 조사해본 결과 환구단의 정문임이 밝혀졌다. 다행히도 우이동 그린파크호텔이 재개발되면서 제자리로 이전, 2009년에 완전 복원을 하였다.
1967년 사적 제157호로 지정되었다.
<대한제국 시기 사진. 왼쪽 황궁우 오른쪽이 환구단>
3D 복원도
환구단 정문
마침 내일 10월13일이 제전을 올린다고 한다.
환구단에서 나와 서울시청과광장을 지나 덕수궁의 대한문에서 덕수궁나들이가 시작된다.
이상으로 5대 궁궐 나들이 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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