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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고대 문인들의 삶과 글 2: 당송시대(2021.06.09)

by 도화유수 2021. 6. 11.

당송시대의 대표 문인 한유 와 유종원

개원지치[ 開元之治 ]

요약 ; 중국 당나라의 현종이 다스린 개원(開元) 연간의 치세 또는 그 시기에 이루어진 것과 같은 태평성대를 비유하는 말이다.

개원은 당나라의 제6대 황제인 현종이 즉위하면서 사용한 연호로서 713년부터 741년까지 29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 시기는 당나라의 전성기를 가리키는 성당(盛唐)에 해당된다. 현종은 즉위 초기부터 요숭(姚崇), 송경(宋璟), 장열(張說), 장구령(張九齡) 같은 현명한 신하들을 잇달아 재상으로 기용하여 선정을 폄으로써 측천무후의 전횡으로부터 빚어진 폐단을 시정하였다. 이 시기가 당 태종이 '정관지치(貞觀之治)'로써 이룩한 태평성대에 버금간다 하여 '개원지치'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는 이 둘을 함께 칭하여 '정관지치, 개원성세(開元盛世)'라고도 한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개원지치'는 '정관지치'와 마찬가지로 정치가 잘 이루어져 태평성대를 누림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백거이(白居易, 772년 ~ 846년)

자(字)는 낙천(樂天)이고,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 등으로 불리었다. 당나라 때 뤄양(洛陽) 부근의 신정(新鄭)에서 태어났다.

당나라 시대의 가장 뛰어난 시인 중의 한 사람. 29세에 진사 시험에 합격, 벼슬길에 올랐으며 35세 때에 창안에서 현위 벼슬로 있으면서 시 《장한가(長恨歌)》를 지었는데 이 시가 세상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의 높은 재주에 감탄하였다. 이듬해에는 정 7품인 조참사로 일하면서 그동안 자기가 느꼈던 사회와 정치를 풍자한 《신악부(新樂部)》 50수와 《주증금》 10수를 지어 더욱 이름을 떨쳤다. 40세에 어머니가 죽자 3년간 벼슬을 버리긴 하였지만, 다시 벼슬길에 나서서 형부상서까지 올랐다가 75세에 사망했다. 45세 때 지은 《비파행(琵琶行)》은 그를 당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이 되게 하였고, 《백씨 장경집(白氏長慶集)》 50권에 그의 시 2천 2백수가 정리 되었으며, 그의 시문 집인 《백씨문집(白氏文集)》은 그의 모든 시를 정리한 시집이다. 그의 시는 짧은 문장으로서 누구든지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작품으로

[시] 장한가(長恨歌), 신악부 50수(新樂部 50-), 주증금 10수, 비파행(琵琶行), 백씨 장경집 50권(白氏長慶集), [시문 집] 백씨문집(白氏文集)

장한가[ 長恨歌 ]

요약  중국 당대의 시인 백거이가 젊은 시절에 지은 서사적인 장가.

제재는 현종(玄宗) 황제와 양귀비(楊貴妃)의 비련(悲戀)에 관한 것이며, 4장으로 되었다. 제1장은, 권력의 정상에 있는 황제와 절세가인 양귀비의 만남과, 양귀비에게 쏟는 현종황제의 지극한 애정 등을 노래하였다. 제2장에서는,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몽진하는 길에, 양귀비를 어쩌다 죽게 한 뉘우침과 외로움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황제의 모습을 그렸다. 제3장은, 환도 후 양귀비의 생각만으로 지새는 황제를 묘사한다. 제4장에서는, 도사의 환술(幻術)로 양귀비의 영혼을 찾아, 미래에서의 사랑의 맹세를 확인하게 되었으나, 천상(天上)과 인계(人界)의 단절 때문에 살아 있는 한 되씹어야 할 뼈저린 한탄이 길게 여운을 끈다.

이 작품에서는 변화무쌍한 서사(敍事)의 사이사이로 사랑의 기쁨, 외로움, 괴로움 등의 서정(敍情)이 섬광처럼 번쩍이며, 외길 사랑으로 탄식만 해야 하는 현종이 새로이 창조되어 인간으로서의 사랑의 비중을 역력히 상징한다.

노래의 형식도 칠언(七言)이어서 유창하고 아름다운 가락이 감겨들며, 행마다 리듬이 박동하고 때로는 각운(脚韻)을 바꾸어 가면서 장장 120행에 걸쳐 선율이 흐른다.

'동자해음장한곡(童子解吟長恨曲)'이라는 말이 있듯 무수한 사람들이 이를 애창하였으며, 시가와 소설과 희곡으로 취급되어 중국 근세문학사상 무한한 제재를 제공하였다. 특히 《장한가전(傳)》은 이 시의 내용을 이야기체로 바꾸어 보라는 백거이의 권유로 진홍(陳鴻)이 지은 전기(傳奇)소설이며, 양귀비의 입궐에서부터, 그녀가 죽은 후 현종의 명을 받은 방사(方士)가 그녀의 영혼을 만날 때까지를 《장한가》 그대로 답습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한가 [長恨歌] (두산백과)

두보[ 杜甫 ](712년 ~ 770년)

중국의 당대(唐代)의 시인. 자는 자미(子美). 두예의 13대 손. 소릉(少陵 : 장안부근(長安附近))에 거주했고,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郎)이 된 데서 두소릉ㆍ두공부라고도 불리며, 두목에 대하여 노두(老杜)라고도 일컫는다. 허난[河南]의 궁센(鞏縣)에서 출생. 몰락기에 있는 중산 관리 계급의 출신. 어려서 어머니 최 씨(崔氏)를 잃고, 뤄양의 숙모 밑에서 양육되었다. 24세 때 진사 시험에 낙제, 산시[山西, 730], 장쑤 및 저장(731~735)ㆍ산둥ㆍ허베이 (736~740, 745) 등에 여행을 시도하고, 이 여행 중에 이백ㆍ고적을 대면(對面), 큰 영향을 받았다. 751년에 집현원대제(集賢院待制)ㆍ우위부주조참군(右衛府胄曹參軍) 등 하급 관직을 역임했다. 756년 숙종의 행재소(行在所)에 가는 도중 도둑에 잡힌 후, 장안에 유폐되었다가 757년 탈출에 성공, 봉상(鳳翔)에 이르러 좌습유(左拾遺)가 되었다. 759년 기근으로 관직을 사임, 가족과 함께 간쑤[甘肅]의 진주(秦州)에 여행, 《북정(北征)》ㆍ《삼리 삼별(三吏三別)》을 지었다. 진주에서 남쪽으로 따라가서 동곡(同谷), 또 쓰촨[四川]에 입성, 759년에 청두[成都]에 도착했다. 이 여행 중의 시는 첨예한 불안으로 차있다. 병란으로 청두[成都]를 떠난 일도 있으나, 대체로 청두 서교(西郊)의 완화 초당(浣花草堂)에 안주, 약초 및 야채를 경작했다. 764년에 친구 엄무의 소개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郎)이 되었다. 그러나 동료와 불화, 곧 관리 생활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충칭[重慶]을 거쳐 윈양[雲陽]에 이르렀다. 그는 지병(持病)으로서 폐병, 당뇨병(糖尿病)을 갖고 있었는데, 더욱 쇠약해져 2년 동안 기주(夔州)에서 요양하고, 768년에 무협(巫峡)을 떠나 궁안[公安]ㆍ웨양[岳陽]ㆍ창사[長沙]ㆍ헝저우[衡州]를 전전하다 770년 사망했다. 기주 시대(夔州時代)의 시는 완성의 경지에 도달, 《추흥 팔수(秋興八首)》 등의 명작이 많다. 그는 중국 문학사상 제1의 시인으로 불린다. 율시(律詩)를 완성하고, 한위악부(漢魏樂府) 민요(民謠)의 정화(精華)를 입함으로써 고체시(古體詩)를 신생(新生)케 했다. 더욱 종래의 문학 전통의 집대성이라는 형식으로 서정시ㆍ서사시를 창조했다. 많은 고난은 그를 폭넓은 휴머니스트가 되게 하고, 그는 그러한 자기를 성실하게 작품에 표현했다. 이백(李白)과는 대조적인 2대가로서 병칭되기도 한다. 현재 《두공부집(杜工部集 20권)》이 전해지는데, 고체(古體) 399, 근체(近體) 1006이 수록되어 있다.

작품으로

춘망(春望), 추흥 팔수(秋興八首), 두공부집(杜工部集), 북정(北征), 삼리 삼별(三吏三別)

이백[ 李白](701~762)

중국 역사상 최초의 여황제 측천무후 치세 말년에 지금의 중앙아시아 쇄엽(碎葉)이라는 곳에서 태어났으며 자(字)를 태백(太白)이라 하였다. 5세에 아버지를 따라 사천 지방으로 이주하여 유년기를 보낸다. 25세경 고향 사천을 떠나 전국을 만유하며 시우(詩友)를 사귀고 자신의 재능을 인정하여 관직에 추천해줄 인사를 찾아다닌다. 42세에 드디어 오균(吳筠)의 천거로 장안(長安)에 입성, 현종을 알현하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라는 직책을 제수 받는다. 그러나 황제를 대신하여 문서를 작성하고 연회에 불려질 노래를 짓는 등의 임무에 만족하지 못하고 마침내 채 2년이 못되어 장안을 나온다. 이후 다시 중원 지역을 만유하며 두보 · 고적 등의 시인들과 친분을 맺고 혹은 도교에 입문하여 도사 생활을 하기도 한다. 그 후 이백 본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영왕의 반란에 일조하게 됨으로써 역모에 가담한 죄로 사형에 처해질 위험에 봉착하게 되었으나 지기(知己)의 도움으로 유배형을 받게 되고 다시 사면되어 양쯔 강가를 유랑하다 62세가 되던 해당도의 친척 집에서 병사하였다.

약 1,000수 가량 남아 있는 이백의 시는 그의 생애 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양하다. 세상을 구제하고자 하는 정치적 이상과 여의치 못한 현실 속에서의 모순된 심정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의 기발한 상상력과 뜨거운 열정은 중국 역대 어떤 문인도 범접할 수 없는 독특하고 초월적인 시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이백의 대표작으로

1) 장진주(將進酒), 2) 월하독작(月下獨酌), 3) 상삼협(上三峽), 4) 협객행(俠客行)

한유[ 韓愈](768년 ~ 824년)

중국 당(唐)의 유학자, 문장가. 자는 퇴지(退之), 당시 당나라는 지배계급 내부에서 보수파의 족벌 호족과 개혁파의 신흥 서족(庶族) 사이에 격렬한 '당쟁'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그의 문필 활동은 이 당쟁 하에서 전개되었다. 문장가로서 유종원(柳宗元) 등과 고문(古文) 부흥에 힘써,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이라 일컬어진다.

유학자로서 석가, 노자를 배척하여 유교정신을 명확히 하고, '도통'(道統)의 관념을 주창하여 송학(宋學)의 선구가 되었다. 즉 석가와 노자의 비판을 통하여 유교의 목적을 인간의 '상생상량'(相生相養)에 두고 유가의 도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군신ㆍ부자의 의를 지켜 널리 대중을 사랑하는 길이라 하였다.

이 도는 요(堯)대에 시작하여 순(舜)에 전해지고, 맹자(孟子)에게까지 이어졌지만, 이후 단절되어 전해지지 않고 석가와 노자의 사상에 빠져 버렸던 것을 그가 명확히 했다고 한다. 이것이 '도통'의 관념이다. 또한 사람의 성(性)에 상ㆍ중ㆍ하의 삼품(三品)이 있다는 주장은 당시의 품급(신분) 질서 하에서의 인간성에 대한 고찰이다.

주요저서 ; 原道, 原性.

 

 

유종원[ 柳宗元](773년 ~ 819년)

자 자후(子厚). 장안(長安) 출생. 유하동(柳河東)·유유주(柳柳州)라고도 부른다. 관직에 있을 때 한유(韓愈)·유우석(劉禹錫) 등과 친교를 맺었다. 혁신적 진보분자로서 왕숙문(王叔文)의 신정(新政)에 참획하였으나 실패하여 변경지방으로 좌천되었다. 이러한 좌절과 13년간에 걸친 변경에서의 생활이 그의 사상과 문학을 더욱 심화시켰다. 고문(古文)의 대가로서 한유와 병칭되었으나 사상적 입장에서는 서로 대립적이었다. 한유가 전통주의인 데 반하여, 유종원은 유·도·불(儒道佛)을 참작하고 신비주의를 배격한 자유·합리주의의 입장을 취하였다.

《천설(天說)》《비국어(非國語)》《봉건론(封建論)》 등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또 우언(寓言) 형식을 취한 풍자문(諷刺文)과 산수(山水)를 묘사한 산문에도 능했다. 그는 이러한 작품을 통해 관료를 비판하고 현실을 반영하는 한편, 자신의 우울과 고민을 술회하였는데, 그 자구(字句)의 완숙미와 표현의 간결·정채함은 특히 뛰어났다. 시는 산수의 시를 특히 잘하여 도연명(陶淵明)과 비교되었고, 왕유(王維)·맹호연(孟浩然) 등과 당시(唐詩)의 자연파를 형성하였다. 송별시 ·우언시(寓言詩)에도 뛰어나 우분애원(憂憤哀怨)의 정을 표현하는 수법은 굴원(屈原)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저서에 시문집 《유하동집(柳河東集)》(45권) 《외집(外集)》(2권) 《보유(補遺)》(1권)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종원 [柳宗元] (두산백과)

주요저서 : 《유하동집(柳河東集)》,《외집(外集)》,《보유(補遺)》

유종원(柳宗元)의 삼계(三戒)  

‘나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근본을 미루어 알지 못하고 다른 것을 빌어 제멋대로인 것을 항상 싫어하였다. 어떤 사람은 세력가에 빌붙어 자기류(類)가 아닌 것을 범하고 재주를 드러내다가 강자에게 노여움을 산다. 시기를 틈타 방자하고 난폭한 짓을 하는데 그러다가 마침내 화를 당한다. 어떤 손님이 노루, 당나귀, 쥐라는 세 가지 동물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그 일과 비슷해서 삼계(三戒)를 지었다’.

삼계 가운데 임강의 노루(臨江之糜) 이야기가 먼저 나온다.

‘임강 사람이 새끼노루를 사냥해 집으로 데려왔다. 집에 있는 개들이 새끼노루를 보고 군침을 흘렸으나, 주인이 그 개들을 꾸짖어 어쩔 수 없이 침을 삼키면서도 노루와 잘 지낼 수밖에 없었다. 3년 뒤에 노루는 자신이 노루임을 망각하고 개와 같은 부류라 생각해서 혼자 바깥으로 나갔다. 노루가 길에서 놀고 있는 개들을 보고 반가워서 같이 놀려고 했는데, 개들은 노루를 잡아먹었다. 하지만 노루는 살점이 뜯겨져 죽어가는 중에도 자신이 왜 죽임을 당하는지 깨닫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세력가와 어울리다 보면 자신이 세력가인 줄 착각해 세력가처럼 굴다가 결국엔 화를 당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두 번째 사례는 검주의 당나귀(黔之驢) 이야기이다.(黔驢之技)

‘검주 땅에는 원래 당나귀가 없었다. 그런데 일 벌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당나귀를 들여와 곧 쓸모없게 되자 산에 버렸다. 호랑이는 처음 보는 나귀의 큰 몸집에 놀라 신(神)이라 여기고 무서워 숲에 숨어서 조심스레 살피고 있었다. 다음날, 당나귀가 한 번 울자 호랑이는 크게 놀랐다. 시간이 흘러 그 울음소리에 익숙해지면서 자세히 살펴보니 특별한 재주가 없어 보였다. 겁을 먹은 당나귀가 발굽으로 찼지만 호랑이에게는 별것이 아니었다. 호랑이가 달려들어 당나귀를 잡아먹었다.’

이 이야기는 권문세가로서 거기에 걸맞는 재주와 능력을 갖춰야 하지만, 자신의 권세만 믿고 행세하다가 무식함이 들통나면, 몸집이 작아도 능력 있는 자에게 잡아먹히는 것을 비유한 내용이다.

마지막으로 영모씨의 쥐(永某氏之鼠) 이야기이다.

‘영주에 사는 사람이 미신을 두려워하고 금기(禁忌)에 얽매이는 게 심했다. 자신이 태어난 해가 쥐띠 해이므로 쥐를 좋아하고 고양이를 기르지 않았다. 하인들에게 쥐를 잡지 못하게 하니 창고와 부엌이 온통 난장판이었다. 동네 쥐들이 이 사람 집에 몰려들었다. 쥐들이 식량을 모조리 축내고 몰려다니며 물건을 갉아대고 소란을 피워도 그 사람은 쥐를 싫어하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 그 사람이 집을 팔고 이사를 갔다. 새 주인이 왔는데도 쥐들은 예전과 같이 행동했다. 주인은 고양이를 풀고 하인들에게 쥐를 잡게 했다. 죽은 쥐가 언덕처럼 쌓이자 쥐들이 다 도망가고 말았다. 쥐의 행패로 생긴 냄새가 몇 달이 지나고서야 그쳤다.’

이 이야기는 자신이 남에게 해를 가하고도 화를 입지 않는 시대를 틈타서 그 시절이 영원히 지속될 거라 생각해 마음대로 굴다가 화를 당한다는 것을 일러주는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