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창박에 비가 우두둑 내리고 있다. 이런 날 집에 기만히 있는 것보다 한갓지게 강화도를 다녀오고 자 한다.
정말 아침에 내린 비의 영향인지 도로가 한산해 쉽게 강화도에 도착하여 지난 2월에 다녀온 교동도까지 달려간다.
빵집에서 빵, 교동도쌀도사고 시장구경하고 오면서 갑곶순교성지를 들린다.
갑곶순교성지[甲串殉敎聖地]
강화도가 천주교와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839년 기해교난을 겪으면서였다. 그동안 천주교 신앙 유입의 통로는 육로뿐이었다. 하지만 육로의 경비와 기찰(譏擦)이 심해지자 해로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강화도와 황해도 연안의 뱃길이 중요하게 되었다.
특별히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는 선교사를 입국시키는 해로로 개척하기 위해 서울 마포를 떠나 이곳 강화 갑곶(甲串) 앞바다, 그리고 연평도 백령도를 거쳐 순위도에서 관원들에게 잡히게 된다. 그래서 이곳 갑곶 해안은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해로 여행지로라고 말할 수 있다. 강화도는 19세기 후반, 한국역사에서 동, 서양의 사상과 문화가 만난 첨예한 갈등을 빚은 곳으로 상징되는 곳이다. 이러한 연유로 1866년(병인년) 부터 시작한 박해로 강화도에 수많은 신자 등이 순교하였으나 현재 알려진 순교자로는 1868년, 프랑스 선교사들을 입국시키는데 협력한 최인서(요한), 장치선 회장과 천주교인으로 최인서와 함께 있다가 잡혀 서울 포청에서 옥살이를 하다 강화 진무영으로 호송되어 효수당한 박서방(박순집의 형), 조서방, 그리고 1871년 신미양요때 박상손(朴常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등이 이곳 갑곶 나루터. 일명 '막구터'에서 목을 베어 말뚝에 올려 놓아 천주교를 경계하도록 하였다.
천주교 인천교구는 문헌상에 나와 있던 갑곶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 그 터를 매입한 후 2000년에 순교성지로 조성하였고, 2001년 9월에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한 박순집의 묘를 이장하였다. 박순집은 참수 희생자는 아니지만 목숨을 걸고 순교자들의 시신을 안장하고, 순교자의 행적을 증언하였으며 성직자들을 보호한 인물이다. 갑곶순교성지는 순교자묘역과 박순집의 묘, 성당, 야외제대, 십자가의 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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