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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활동

시민대학(성균관대 한비자)수업후 성균관을 돌아보다.(2019.04.26)

by 도화유수 2019. 4. 26.

성균관의 대성전



올해도 서울시민자율대학 등록일자에 맞추어 등록을 했다. 이현구 교수의 수업을 계속 들을 수 있어 다행이다.


3월 29일 개강하는 날 봄꽃이 환영을 한다.





어제밤에 시작한 비가 아침에도 조금씩 내리고 있다.



수업후 성대 학생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잔듸광장을 지나 셔틀버스를 기다리다 갑자기 성균관을 보고싶어졌다.


600주년 기념관



이번에 주변을 정비한 비천당



성균관의 외부 부속 건물 비천당.

비천당(丕闡堂)

강당이나 과거 시험장으로 쓰이던 건물로 명륜당 서북쪽에 위치한다. 현종 5년(1664년)에 도성 안의 사찰인 인수원(仁壽院)과 자수원(慈壽院)을 헐면서 나온 자재를 가져다가 성균관에 비천당과 함께 그 서남쪽으로 벽입재(闢入齋)와 일양재(一兩齋)를 세웠는데, 그 이름은 송시열이 큰 도를 크게 밝힌다(丕闡大猷)는 주희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벽입재와 일양재는 모두 구한말에 파괴되었고, 비천당은 해방 후 한동안 성균관대학의 대학 본부로 사용되다가 6.25 전쟁으로 소실되어 1988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성균관대의 부지 부족으로 인해 비천당 앞 마당을 주차장으로 쓴 적이 있었는데, 도올 김용옥이 이를 보고서 매우 한탄했다고 한다. 이후 주차장으로 쓰지 않고 공터로 남겨두고 있다.



1. 성균관 개요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3가 53에 위치한 조선 시대의 고등 교육 기관이자 공자를 위시한 성현들이 모셔진 유교의 사당. 면적은 81,673㎡. 태학(太學), 문묘(文廟), 반궁(泮宮), 행단(杏壇)이라고도 한다. 1964년 11월 10일 사적 제143호로 지정되었으며 문화재로서의 공식 명칭은 '서울 문묘와 성균관(Seoul Confucian Shrine and Seonggyungwan National Confucian Academy)'이다.

'성균관'이라는 이름에서 '성균(成均)'은 성인재지미취(成人材之未就), 균풍속지부제(均風俗之不齊) 각각의 앞 글자들을 따온 것으로, '인재로서 아직 성취하지 못한 것을 이루고, 풍속으로서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고르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소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2007년)과 이를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2010년)로 인지도를 얻었지만, 사실 세계문화유산인 종묘와 비교하면 여러 모로 콩라인이다. 게다가 중국의 종묘는 문화대혁명으로 개박살나서 한국에 있는 것이 세계 유일이라지만, 성균관은 그와 비슷한 성격의 세계 문화 유산 공묘가 어엿이 중국에 존재한다. 물론 공묘가 성균관처럼 국가적 고등 교육을 수행하던 기관은 아니지만, 워낙 그 규모와 위상이 대단한지라 대개 성균관의 우위에 둔다. 고려 성균관도 등재됐는데...

매년 봄과 가을마다 유교의 성현들을 제사하는 석전대제가 거행됨에 따라 한국에서 유일하게 팔일무와 더불어 종묘제례악에 비견되는 문묘제례악이 정기 연주되는 장소이며, 이것은 중국으로 역수입되어 문화대혁명으로 실전되었던 공묘의 제공대전을 가까스로 재현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그놈의 문화 대혁명.

일제강점기 때 성균관은 경학원, 명륜전문학교 등으로 격하되었고 1943년에 폐교당했다. 1945년에 광복이 되면서 명륜전문학교가 부활하고[3] 경학원이 성균관으로 명칭을 회복했다.[4]

더불어 유림의 대표이자 열혈 독립투사인 김창숙 선생의 주도하에 1946년 기존 성균관 바로 옆자리에 성균관의 정통을 이어받은 신식대학-성균관대학-이 설립됐다.

이후 재단 분규가 있었고, 이로 인해 1963년에 학교법인 성균관대학과 재단법인 성균관으로 분리되었다.[5] 이후 삼성그룹 창업주 호암 이병철 회장이 1965년부터 1977년까지 성균관대 재단 이사장을 맡아 대학을 지원했고, 1979~1991년까지 봉명재단을 거쳐 1996년 삼성그룹이 다시 재단 경영에 참여해 오늘에 이르렀다. 성균관은 유교 및 전통 문화 전문 교육 기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오늘날로 치면 서울대학교라고 하지만 성균관은 국가공무원을 양성하는 기관이라서 프랑스의 그랑제콜과 비슷하다 한마디로 국립 정치행정대학원과 졸업시험으로 진사시(학석사학위시험과 공무원 고시 1차시험)이라 할 수 있다.



비천당에서 옆문으로 바로 명륜당에 이른다.


강학 영역

명륜당(明倫堂)

성균관 유생들의 교육을 위한 강당이자 과거 시험장으로 대성전 북쪽에 위치한다. 태조 7년(1398년)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9년(1606년)에 중건하였다. 현판은 명의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썼다. 본당은 정면 3칸에 측면 3칸으로 맞배지붕이며, 좌우 익사는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팔작 지붕이다. 기단에는 본당 앞으로 월대가 있고 좌우 익사 및 월대 정면과 좌우의 돌계단을 통해 기단에 오르내리도록 되어 있다. 그 독특한 생김으로 말미암아 사실상 성균관의 마스코트와도 같은 건물로, 천 원짜리 지폐 앞에도 그려져 있다. 내부에 걸린 현판 중에는 박문약례(博文約禮)라는 현판이 있는데, 이것은 공자의 77세손으로서 제32대 연성공(衍聖公)이자 초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大成至聖先師奉祀官)을 지낸 공덕성(孔德成, 1920년 2월 23일 ~ 2008년 10월 28일)의 글씨다.

동재(東齋)·서재(西齋)

성균관 유생들이 기숙하던 건물로 명륜당 뜰의 동서에 위치한다. 태조 7년(1398년)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9년(1606년)에 중건하였다. 각각 정면 20칸에 측면 3칸으로 동재는 동쪽을, 서재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정면 1칸을 퇴칸으로 개방하여 마루를 설치하고 본칸에는 온돌을 설치하였다.

문묘 은행나무

행단(杏壇)[9]을 상징하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로 명륜당 뜰에 위치한다. 중종 14년(1519년)에 대사성을 지낸 윤탁(尹卓)이 심었으며, 나이는 500살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는 26m이고 가슴 높이의 둘레는 12m에 달하는 웅장한 나무로 발달이 왕성하고 그 중에서도 동쪽의 나무는 6.25 전쟁으로 포탄을 맞아 가지가 일곱으로 갈라졌지만 가까스로 상처가 회복되었다. 천연 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되어 있다.

존경각(尊經閣)

성균관의 장서를 보관하던 도서관으로 명륜당 북쪽에 위치한다. 소장된 장서는 각종 유교 경전과 역사서로 한정되었고, 불교 및 도교와 여타 기술 서적은 소장하지 않았다. 성종 7년(1476년)에 창건되어 중중 9년(1514년)의 화재와 임진왜란으로 두 차례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13년(1621년)에 중건하였다. 1924년 경성 제국 대학이 설립되자 대부분의 장서들이 경성 제국 대학으로 강제 이관되고, 남은 장서들도 6.25 전쟁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육일각(六一閣)

군자가 갖추어야 할 육예(六藝) 가운데 하나인 궁술을 익히고 이와 관련된 대사례(大射禮)에 쓰이는 활과 화살을 보관하던 건물로 존경각 동쪽에 위치한다. 영조 19년(1743년)에 영조가 직접 대사례를 행하고 이를 기념하여 건립하였고, 본래는 향관청의 서쪽에 있었다.






제향 영역

대성전(大成殿)

공자를 비롯한 유교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문묘 행사를 거행하는 곳이다. 태조 7년(1398년)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5년(1602년)에 중건하였다. 현판은 한호(韓濠)가 썼다. 정면 5칸에 측면 4칸으로 정면 1칸을 퇴칸으로 개방하여 향사시의 동선으로 사용한다. 기단에는 양 측면으로 계단이 있고 또한 전면에도 동서로 계단이 있는데, 이 가운데 서쪽은 빈계(賓階)라 하여 신삼문에서 신도(神道)를 타고 들어온 성현들의 넋이 오르는 계단이고 동쪽은 조계(阼階)라 하여 향사시 제관들이 오르는 계단이다.[8]

동무(東廡)·서무(西廡)

중국 94현과 한국 18현의 위패를 모시던 공간으로 대성전 뜰의 동서에 위치한다. 태조 7년(1398년)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7년(1604년)에 중건하였다. 1949년 유림 대회의 결정으로 한국의 18현을 대성전으로 올리고 중국의 94현은 땅에 매안(埋安)하여 현재 동무와 서무는 비어 있다. 각각 정면 11칸에 측면 2칸으로 정면 1칸을 퇴칸으로 개방하여 향사시의 동선으로 사용한다.

묘정비(廟庭碑)

문묘의 연혁을 기록한 비석으로 대성전 뜰 동남쪽에 위치한다. 태종 10년(1410년)에 처음 묘정비를 세웠는데, 비문은 왕명을 받들어 변계량(卞季良)이 지었다. 중종 6년(1511년)에는 비각을 세웠다. 임진왜란 때 훼손되자 인조 4년(1626년)에 다시 묘정비를 세웠는데, 비문은 이정귀(李廷龜)가 짓고 이홍주(李弘胄)가 썼으며 제액은 김상용(金尙容)이 썼다. 비석은 커다란 귀부(龜趺)가 받치고 있으며, 높이는 187㎝에 해서체로 쓰여져 있다.

제기고(祭器庫)

문묘의 향사에 사용되는 제기를 보관하는 건물로 서무의 서쪽에 위치한다. 태조 7년(1398년)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5년(1602년)에 중건하였다.

수복청(守僕廳)

문묘의 관리를 담당하던 남자 하인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제기고 북쪽에 위치한다. 재학당(載學堂)이나 근관직청(芹官直廳)이라고도 한다.

전사청(典祀廳)

문묘의 향사에 사용되는 제수를 준비하는 건물로 수복청 북쪽에 위치한다. 성종 3년(1472년)에 창건하였고, 1986년에 복원하였다.

포주(庖廚)

문묘의 향사에 사용되는 제물을 검사하고 손질하던 곳으로 전사청의 북쪽에 위치한다. 태종 7년(1407년)에 창건하였고, 1975년에 복원하였다













동재로 들어가는 출입문 입구에는 오래된 명자나무가 꽃을 피웠다.


관리 영역

정록청(正錄廳)

성균관의 관원들이 근무하던 사무실로 명륜당 서쪽에 위치한다. 태조 7년(1398년)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인조 4년(1626년)에 중건하였다.

서리청(書吏廳)

성균관의 관원들이 근무하던 사무실로 정록청 동북쪽에 위치한다. 정조 대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14칸의 건물이 안뜰을 중심으로 冂자를 이루고 있는데, 본당은 정면 5칸에 측면 2칸이고 서측 익사가 1칸에 동측 익사가 3칸이다. 개방 시간에도 출입이 통제되는 건물이다.

직방(直房)

성균관의 관원들이 쉬어가던 대기실로 정록청 뜰의 동쪽에 위치한다.

고직사(庫直舍)

정록청에 드나드는 문간채로 정록청 남쪽에 위치한다. 고문(庫門)이라고도 한다. 전체 4칸 가운데 문간을 중심으로 서쪽 1칸은 사무실로, 동쪽 2칸은 창고로 사용된다.

향관청(享官廳)

문묘의 향사 때 제관들이 숙식하고 제사에 쓰이는 향과 축문을 봉안하는 건물로 육일각과 정록청의 북쪽에 위치한다. 성종 4년(1473년)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효종 4년(1653년)에 중건하였다.

동월랑(東月廊)·서월랑(西月廊)

문묘의 향사 때 집사들이 숙식하고 평소에는 성균관의 유생들이 기숙하던 건물로 향관청 뜰의 동서에 위치한다. 성종 4년(1473년)에 창건하였고, 1986년에 복원하였다.


향관청





외부 부속 건물

탕평비(蕩平碑)

영조 18년(1742년)에 성균관의 유생들이 당쟁에서 벗어나 참다운 인재가 되기를 권장하기 위해 영조의 어필을 새겨서 세운 것으로 어서비(御書碑)라고도 불린다. 본래 반수(泮水)를 건너는 향석교 뒤에 세워져 있었으나 1980년에 성균관대학교 정문 자리에 있던 대성문(大成門)과 가깝다는 이유로 보다 남쪽인 지금의 자리에 이전되었다.

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不周 寔小人之私心 / 두루 사귀되 가리지 않음은 곧 군자의 공심(公心)이고, 가려 사귀되 두루치 않음은 바로 소인의 사심(私心)이다.

하마비(下馬碑)

궁궐과 종묘 사직 등 엄숙한 장소의 입구에 세워서 이곳을 지나는 자는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알리기 위해 비석이다. 본래 성균관 일대 반촌(泮村)의 어귀에 세워져 있었으나 현재는 이전되어 탕평비각의 왼쪽에 세워져 있다. 비석 뒷면에는 정덕 14년(1519년)에 세웠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大小人員 過此者 皆下馬 / 크건 작건 이곳을 지나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

하련대(下輦臺)

석전대제나 알성시 등이 거행되어 임금이 친히 성균관에 행차할 때 타고 온 가마(輦)를 내려놓는 곳이다. 동삼문 맞은편에 위치한다.







석전대제

매년 봄과 가을에 대성전에서는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성현들에 대한 제사가 거행되는데, 1953년부터 음력 2월과 8월의 첫 정일(丁日)에 이를 거행하다가 다시 2007년부터는 공부자서거일(5월 11일)과 공부자탄강일(9월 28일)에 거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석전(釋尊), 석채(釋菜), 정제(丁祭), 상정제(上丁祭)라고도 한다. 1986년 11월 1일 중요 무형 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으며 문화재로서의 공식 명칭은 '석전대제(Ritual for Confucius)'이다.

그 외

성균관 인근에는 성균관에서 일하는 사역인들이 모여 사는 반촌(泮村)이라는 동네가 있었다. 이 사역인들 중에는 성균관에서 쓰는 고기들을 다루는 백정들도 많이 있었다. 최악의 천시를 받았던 다른 백정들과는 달리 이 반촌의 백정들은 성현들의 영혼과 성균관 유생들에게 고기를 바친다는 자부심이 매우 강했고, 성균관 출신의 고위층 인사들과도 학생시절부터 안면을 트고 지내며 생긴 연줄이 있어서 한성부 관리들조차 함부로 다루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이 때문에 반촌은 일종의 치외법권 지대로 바뀌었으며[14] 한성부의 다른 지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특이한 상점과 물건들이 존재하며 성균관 유생들이 유흥을 즐기는 이색적인 번화가로 자리잡았다. 쉽게 말해서 조선 시대의 대학로나 신촌과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이 반촌의 위치는 현대의 대학로(서울)와도 상당 부분 면적이 겹치는 편이다. 심지어 반촌민들의 말투도 서울 내 다른 지역 사람들과도 판이하게 달랐다.

반촌의 기원은 고려 말 안향이 성균관에 기부한 노비들이라고 하며 그들의 후예들이 조선 성립 이후에도 한양으로 이주하면서 반촌을 형성하였다고 한다.[15] 따라서 반촌 사람들은 자신을 안향의 노비들의 후예라고 믿었으며, 안향의 후손이 성균관에 들어오면 '옛 주인의 후손이 오셨다'고 하면서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북한 개성에도 성균관이 있다. 다만, 한양 천도 후 최고학부로서의 기능은 잃었고, 향교로서 존재했으나 '성균관'이라는 이름만큼은 계속 사용하였다. 2013년에 성균관이 포함된 개성 역사 유적 지구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을사오적 중 이완용과 박제순이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적이 있다. 다만, 고종 대에는 성균관이 그렇게 권력이 있는 기구가 아니었기에 대사성 명함은 그냥 명예직이자 한직이라고 볼 수 있다. 고종의 재위 기간 중 거쳐간 대사성이 수백 명은 되는 걸 보면...

한편으로는 이런 일류 국립 대학(?)인 만큼 성균관 유생은 특혜도 많았다. 우선 오늘날로 치면 입학금이니 등록금이니 하는거 모두 없이 성균관에서 수업받는건 반촌에서 하숙생활 하지 않는 이상에야 모두 무료였고 성균관 유생만을 위한 과거 시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랬던만큼 성균관 유생이 되는 조건은 아주 까다로워서 일단 성균관 유생이 되려면 적어도 소과 합격은 해야 가능했다. 즉 진사나 생원이라는 칭호는 달아야 노려볼 수 있는 자리였다는것 여기에 저 특혜를 얻으려면 연간 300일의 출석을 달성해야 했다.[16][17] 여기에 툭하면 시험으로 매일 치는 시험 매달 치는 시험 등등 줄줄이 시험이었다.

하지만 그랬던 만큼 권위도 세서 세자가 나이가 차면 하는것도 성균관 입학례였고[18] 성균관 유생들은 학생운동처럼 정치적인 활동도 벌였는데 이때 '공관' 이라는것은 어마무시한 영향력을 끼쳤다. 대게 정책에 대한 반대운동을 벌이면 먼저 반대한다는 뜻의 집단상소를 벌였고 그래도 안되면 단식투쟁을 벌였다. 그래도 안되었을때 쓰이는 최후의 스킬이 공관인데 이게 뭐냐면 아얘 성균관 유생들이 수업받기를 거부하는 일을 말한다. 단순히 수업거부니 유생들 손해 아닌가 싶겠지만 실상은 공관쯤 되면 왕도 골치아픈 상황에 이른다. 국가에서 직접 선발해 대우해주며 키우려는 인재들이 일제히 수업을 거부하는것도 거북할 일일 뿐더러 특히 수업일수 300일을 채워야 하는 사정상 공관이 길어지면 그만큼 성균관 유생들은 수업일수를 채우기 어려워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들은 특별 시험을 못본다. 다르게 보면 나라에서 직접 선발하고 키운 인재들이 집단자폭을 선택하는것 이렇게 되면 여론도 슬슬 도대체 얼마나 잘못했길래 일이 이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냐고 하고 대간에 대신들까지 유생들의 편을 들테니 난감한건 당연, 여기에 지방에 있는 유생들까지 이에 자극받아 연명상소니 만인소니 올려대면 그때면 상소폭탄까지 받아야 한다(...) 게다가 여러 안건들도 상당수는 성균관을 비롯한 많은 유생들이 올리고 이를 대간이 받아 주청하고 다시 대신이 받아 주청하는 방식이니 성균관 유생들은 언론의 역할도 했다고 볼 수 있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