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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손기정 기념관(중림동)

by 도화유수 2017. 9. 20.

<중림동 주민센터 앞에 있는 손기정 기념관>


<팜플릿>





서울시청 시민청 지하2층 태평홀에서 서울시민대학 수업을 마치고 서울역 뒷편으로 손기정 기념관을 향한다. 서울로(옛고가)를 지나 중림동 주민센터 앞에 있는 손기정 기념관에 도착한다. 마라톤을 하면서 오래전부터 찾아보고픈 곳이다.









손기정 선수가 베르린올림픽에서 신었던 지카다비.


그당시 양정고보의 모습.





손기정 [孫基禎] - 1936 베를린올림픽의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인물한국사)

‘한국 대학생(koreanischer Student)이 세계의 건각들을 가볍게 물리쳤습니다. 그 한국인(der Koreaner)은 아시아의 힘과 에너지로 뛰었습니다. 타는 듯한 태양의 열기를 뚫고, 거리의 딱딱한 돌 위를 지나 뛰었습니다. 그가 이제 트랙의 마지막 직선코스를 달리고 있습니다. 우승자 ‘손’이 막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 독일역사박물관(DHM) 독일방송기록보관실(DRA) 자료.

1936년 8월 9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이 1등으로 스타디움으로 들어왔을 때 이를 중계했던 장내 아나운서의 멘트이다. 당시 독일의 중계 아나운서는 그가 일본국적에 손기테이란 묘한 이름으로 올림픽에 참가하긴 했으나, 그가 Koreaner(한국인)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스타디움 안으로 달려온 손기정은 장내 트랙을 한 바퀴 마저 돌며 마라톤 42.195km의 마지막을 채웠다. 운집한 관객들을 그의 마지막 질주를 숨죽여 지켜보았다. 결승선에 도착하기 전 그의 마지막 100m 기록은 11초였다. 전력을 다해 뛰어가는 동양에서 온 작고 다부진 마라토너. 그의 얼굴엔 표정이 거의 없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고 담담하고 묵묵하게 결승선을 통과했다. 2시간 29분 19초 2. 신기록이었다. 당시로써는 인간이 넘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마의 2시간 30분대를 넘어선 것이다.

세계무대에 알려진 바 없는 동양에서 온 이 작고 과묵한 청년 마라토너는 세계인들뿐만 아니라 아라아인종의 우월성을 과시하려 했던 나치들마저도 감동하게 했다. 히틀러는 기꺼이 그와 악수하려 하였고 히틀러를 도와 인종주의적인 다큐멘터리 [올림피아]를 제작하던 독일의 영화감독 레니 리펜슈탈은 3시간짜리 다큐멘터리 중에 10분 이상을 손기정의 뛰는 모습으로 채웠다. 그녀는 손기정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으며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싶어했다.


가난해서 달리는 것 밖엔 할 수 없었던 소년

손기정은 1912년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소학교 다닐 무렵 해일로 인해 집안이 몰락한 손기정은 어린 시절부터 장사에 나서야 했으며 소학교를 졸업한 뒤 16세 무렵에는 중국 단둥[]의 회사에 취직했다. 이 무렵 손기정은 차비가 없어서 신의주∼압록강 철교∼단둥에 이르는 20여 리 길을 매일 달려서 출퇴근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가난이 그의 체력단련에 도움이 된 것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달리기뿐만 아니라 운동에 소질을 보였다. 품팔이와 배달일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손기정은 겨울에 얼어붙은 압록강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학생들을 무척 부러워했다고 한다. 자신에게 스케이트를 살 돈만 있었다면 스케이트 선수를 했지 마라톤은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운동 소질을 발휘할 길은 경비가 들지 않는 달리기뿐이었다. 손기정은 소학교 6학년 때 안의전(중국 안동과 신의주 간 대항경기)에 출전하여 어른들을 제치고 5,000m에서 우승하였고 1931년 10월에는 전국체육대회(조선 신궁 대회)에 평안북도 대표로 출전하여 5,000m에서 2위를 하였다. 이듬해 1932년 동아일보 주최 하프 마라톤에서 2위를 하면서 이 인연으로 양정고보에 입학하게 된 손기정은 중단했던 학업을 계속할 기회를 얻고 본격적으로 마라톤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그저 혼자서 달리는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선수로서 훈련을 받은 손기정의 실력은 나날이 성장하였다. 손기정은 1933년부터 1936년까지 13번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고 그 중 10번 우승했다. 그리고 이러한 발군의 실력으로 인해 일본의 올림픽 국가대표로 발탁되기에 이르렀다.


우울한 우승자

1936년 8월 9일 오후 3시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시작된 마라톤. 이 경기는 왕복코스를 도는 경기였다. 세계 각국에서 온 56명의 선수들이 함께 출발했다. 손기정은 양정고보 선배이던 남승룡과 함께였다. 출발신호와 함께 선수들이 빠져나갔다. 손기정과 남승룡은 출발이 다소 늦었다. 손기정은 22번째, 남승룡은 49번째였다. 당시 세계의 주목을 받던 선수는 1932년 LA 올림픽의 금메달리스트였던 아르헨티나의 후안 카를로스 자바라였다. 자바라의 성급한 독주를 뒤에서 바라보면서 손기정은 자신의 기록과 페이스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사전에 코스를 철저히 답사해 둔 것도 도움이 되었다. 결국, 30km지점 비스마르크 언덕오르막에서 자바라는 뒤로 쳐지고 손기정과 영국의 하퍼가 1,2위를 다투며 앞섰다, 그 뒤를 남승룡이 따랐다. 그리고 31km 지점에서 손기정은 마침내 하퍼를 따돌리고 1위로 나섰다. 작은 러닝슈즈로 인해 발에 통증을 느끼면서 손기정은 남은 레이스를 1등으로 묵묵히 달려 영광의 마라톤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남승룡은 하퍼에 뒤이어 3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결승선 통과 후 손기정은 만세도 하지 않았고 환호도 부르지 않았다. 그저 레이스 내내 자신을 괴롭혔던 운동화를 벗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탈의실로 퇴장했다. 올림픽의 꽃인 마라톤의 금메달리스트가 보일 수 있는 태도는 전혀 아니었다.

시상대의 손기정과 남승룡도 마찬가지였다. 은메달을 딴 하퍼의 해맑음과 대조적으로 손기정과 남승룡은 우울해 보였다. 스타디움에 일장기가 오르고 일본 국가 ‘기마가요’가 흘러나올 때 월계관을 쓴 손기정과 남승룡은 더욱 고개를 숙였다. 손기정은 월계수 나무로 입고 있던 옷에 새겨진 일장기를 가렸다. 손기정은 의기소침했고 슬퍼 보였다. 자신이 고통스럽게 발로 뛰어 얻은 이 영광이 조국의 것이 아니라 조국의 국권을 피탈한 일본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일장기 말소사건

비록 일본국적으로 나가서 딴 올림픽 금메달이었지만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소식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는 한없는 기쁨과 희망이 되었다. 선수를 국제대회에 내보내 놓고 언론 기자도 현지에 파견하지 못하는 식민지 언론사는 일본 신문에서 받은 사진으로 금메달 획득의 낭보를 국민들에게 알릴 수밖에 없었다.

손기정이 8월 9일 금메달을 딴 뒤 나흘 후 8월 13일에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에 손기정의 시상식 장면을 찍은 사진이 한 장 게재되었다. 옆에서 비스듬히 찍은 원래 이 사진은 손기정이 월계수나무로 일장기를 가렸음에도 불구하고 일장기가 확연히 보이는 사진이었다. <조선중앙일보>는 인쇄 품질이 나쁜 점을 이용해 일장기가 흐려져 잘 보이지 않게 만든 다음, 이 사진을 신문에 올렸다. 총독부는 인쇄의 문제로 생각하고 검열을 통과시켰다.

손기정이 입은 옷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워서 올린 신문 사진. 이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는 폐간하였고 <동아일보>는 무기한 정간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 일장기 말소 문제가 불거진 것은 8월 25일 <동아일보>에 다시 한번 이 사진이 게재되면서였다. 당시 동아일보 체육부 기자이던 이길용은 사회부장이던 현진건 등과 의논하여 손기정이 입은 옷에서 일장기를 완전히 지웠다. 이는 비록 일본의 국기를 달고 경기에 나가 금메달을 땄지만, 손기정은 어디까지나 조선인임을 자부하고 싶은 언론인들의 소심한 항거였다.

<동아일보> 기사는 총독부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고 소급하여 <조선중앙일보>의 기사도 문제가 되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의 사장 여운형은 책임을 지고 사장 자리에서 사퇴하였으며 신문은 폐간되었다. <동아일보>는 간부 사직과 함께 이길용, 신낙균, 현진건 등 관련자들이 구속되었으며 무기 정간조치를 받았다. 이후 <동아일보>는 당시 기자들의 행동이 사측의 입장과는 다르다는 주장을 펴서 결국 정간을 풀고 9개월 만에 신문을 재발간 했다.

이 사건에 더하여 손기정은 월계수나무로 일장기를 가리려 했다는 혐의를 받아. 이후 경기 출전이 금지되었으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다.


은퇴 후 행보 

영광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지만 식민지의 금메달리스트는 일제로부터 합당한 대우조차 받지 못했다. 양정고보를 졸업한 손기정은 일본의 메이지 대학 법학과에 들어가 학업을 마쳤다. 1944년 손기정은 조선저축은행 은행원으로 일했으며 일장기 말소사건 때 관계를 맺은 여운형을 도와 독립운동의 연락담당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손기정은 1947년과 1950년에 마라톤 코치로 활동하여 서윤복과 함기용이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이후 손기정은 대한체육회 부회장, 대한육상경기연맹 부회장, 서울특별시 육상경기연맹 이사장,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성화 봉송자로 뛰었다.

한편, 당시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경기에는 그리스 아테네 브라드니 신문사가 우승자에게 수여하는 고대 그리스 청동투구가 부상으로 있었다. 이 투구는 손기정에게 바로 전달되지 못하고 50년간 베를린의 샤로텐부르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가 1986년에 가서야 손기정의 손에 전달되었다. 손기정은 이를 1994년 국가에 기증하였다.

손기정의 금메달은 현재까지도 일본이 딴 금메달로 되어 있고 올림픽 공식 기록에는 손기정의 국적 또한 일본, 이름도 손기테이로 되어 있다. 살아생전 손기정은 이것을 바로 잡기 위해 무척이나 애썼지만 일본 올림픽위원회가 손기정에 대한 국적 변경 신청을 해주지 않아 실현되지 않았다. 다만, 손기정의 일대기를 쓴 자료에는 국적을 한국으로 밝히고 있으며 그의 이름 손기정을 표기하였고, 당시 그가 일본국적을 달고 경기에 나올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힘들게 딴 금메달을 조국의 영광으로 돌리지 못한 한 때문이었을까? 1992년 8월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가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손기정은 누구보다도 황영조의 우승을 기뻐하며 마치 자신의 우승처럼 여기며 이런 말을 남겼다.

<오늘은 내 국적을 찾은 날이야. 내가 노래에 소질있다면 운동장 한복판에서 우렁차게 불러보고 싶다. >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