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5일(월) 아침05:30에 알람을 설정해두고 잤는데 새벽에 깨었다 다시 잠들고 깨니 5시이다. 얼른 TV를 켜니 유로2024 결승전 후반전을 시작한다. 그 극적인 골을 다 보는 호사를 한다. 축구를 보면서 산행준비 배낭을 꾸리고 등등 후 06:25 집을 나선다. 아파트 화단에 작은새를 만나다.
정안알밤휴게소에서 잠시 쉰 우리차량은 곧 동학사 주차장에 닿는다. 요즘 장마로 인하여 황토빛의 금강이 눈에 들어온다.
동학사에 도착
오늘의 등산 시작점으로 되돌아 와서 산행이 시작된다. 세진정
계룡산 갑사
계룡산의 계는 금계(금닭)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을 뜻하고(金鷄抱卵形), 룡은 용이 하늘을 나는 형태(飛龍昇天形)라 해서 계룡산이라 불리웁니다.
갑사는 420년 아도화상에 의해 창건되었으며(천진보탑), 백제 위덕왕 3년(556) 혜명대사가 천불전과 보광명전, 대광명전을 신축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통일신라 의상대사가 중수하여 화엄십찰(화엄대학지소/국중대찰)로 발전하였습니다.
계룡산 갑사는 420년(백제 구이신왕 원년)에 창건되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화엄십찰이 되어 국중대찰(國中大刹)로 번창했으며, 고려시대에도 이어졌습니다. 조선시대 정유재란(1597) 때 사찰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으나, 1604년(선조37)을 시작으로 1654년(효종5) 크게 중창하였으며,1875년(고종12)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계룡산은 통일신라시대에는 오악(五嶽) 중 서악(西嶽)으로 제를 올려 왔고, 조선 시대에는 묘향산의 상악단(上嶽壇), 지리산의 하악단(下嶽壇)과 함께 이 산에 중악단(中嶽壇)을 설치하고 국가에서 산신제를 올렸습니다. 이처럼 예로부터 국가의 중요한 명산으로 자리를 잡은 계룡산은 1968년 12월 31일자로 경주·한려해상과 함께 두 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계룡산은 1392년 조선을 건국하였을 때, 새 도읍을 정하려고 준비 중인 태조 이성계는 왕사(王師) 무학대사와 이곳에 들려 국가의 수도로 점찍었던 지역입니다. 무학대사는 계룡산이 수태극(水太極) 산태극(山太極)의 형상이라 도읍으로 정할 것을 주장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결국 한양, 지금의 서울로 수도를 정함.)
산 이름은 주봉인 천황봉(天皇峯, 846.5m)에서 연천봉(連天峯, 739m)·삼불봉(三佛峯, 775m)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마치 닭 볏을 쓴 용의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전해지는데(금계포란형, 비룡승천형), 이곳에 사는 동식물 분포는 식물이 860종, 포유류 25종, 조류가 52종, 곤충류가 1,184종, 양서·파충류 16종, 담수어 25종 등으로 약 2,100여 종의 동식물이 사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국립공원 계룡산은 8종류의 천연기념물과 3곳의 전통사찰이 위치하고 있으며, 그곳에는 국보 2점(갑사, 신원사), 보물 12점(갑사, 신원사, 동학사)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갑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입니다. 예로부터 이곳은 계룡갑사(鷄龍甲寺)·갑사(岬寺)·갑사사(甲士寺)·계룡사(鷄龍寺)라고도 하였습니다.
갑사는 420년에 계룡산 천진보탑을 보고 아도가 창건하였다는 설과 556년(진흥왕 17)에 혜명이 창건하였다는 설, 아도가 창건하고 혜명이 중창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679년(문무왕 9) 의상대사(義湘)가 갑사를 중수하여 ‘화엄대학지소 (華嚴大學之所)’로 삼았으며, 이때부터 신라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가 되었습니다(최치원 「당대천복사고사주번경대덕법장화상전」, 904). 이후 고려를 거쳐 조선 초기 숭유억불정책 와중에도 선종 18개 사찰로 이름을 올리면서 사세가 확장되기도 하였습니다. (「세종실록 24권」, 세종 6년 4월 5일 경술기사).
이후 1597년 정유재란으로 사찰이 소실되기도 하였으나, 1604년 (선조 37)을 시작으로 1654년(효종5) 사정·신휘·경환·일행·정화·상균 등의 승려가 관찰사 강백년의 도움을 얻어 갑사를 크게 중창하였습니다. 1659년에는 여주목사 이지천이 지은 계룡산 갑사사적비명을 건립하였고, 1875년(고종 12)에 중수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편, 계룡산 갑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 기허당 영규대사와 승병들의 숨결이 있는 곳으로 호국불교의 중심에 서 있으며, 현재 국보 1점, 보물 8점 등 수많은 문화재가 있는 전통사찰입니다.
현존하는 부속 산내암자로는 신흥암, 대자암, 내원암, 대성암이 위치하고 있고, 봄에는 마곡사, 가을에는 갑사가 아름답다고하여 춘마곡 추갑사라고 불리는 관광명소입니다.
계룡 8경
제1경 천황봉 일출(845m) 2경 삼불봉(775m)설화
3경 연천봉(740m) 4경 관음봉(766m) 한운
5경 동학계록 신록 6경 갑사계곡 단풍
7경 은선폭포 운무 8경 남매탑 명월
작가 이상보의 수필 " 갑사가는 길 " 을 옮깁니다.
지금은 토요일 오후, 동학사(東鶴寺)엔 함박눈이 소록소록 내리고 있다. 새로 단장(丹粧)한 콘크리트 사찰(寺刹)은 솜이불을 덮은 채 잠들었는데, 관광(觀光) 버스도 끊인 지 오래다. 등산복 차림으로 경내(境內)에 들어선 사람은 모두 우리 넷뿐, 허전함조차 느끼게 하는 것은 어인 일일까? 대충 절 주변을 살펴보고 갑사(甲寺)로 가는 길에 오른다. 산 어귀부터 계단으로 된 오르막길은 산정(山頂)에 이르기까지 변화가 없어 팍팍한 허벅다리만 두들겼다. 그러나, 지난 가을에 성장(盛裝)을 벗은 뒤 여윈 몸매로 찬바람에 떨었을 나뭇가지들이, 보드라운 밍크 코트를 입은 듯이 탐스러운 자태(姿態)로 되살아나서 내 마음을 다사롭게 감싼다. 흙이나 돌이 모두 눈에 덮인 산길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오르는 우리들은, 마치 북국(北國)의 설산(雪山)이라도 찾아간 듯한 아취(雅趣)에 흠씬 젖는다. 원근(遠近)을 분간(分揀)할 수 없이 흐릿한 설경(雪景)을 뒤돌아보며, 정상(頂上)에 거의 이른 곳에 한일자(一字)로 세워 놓은 계명정사(鷄鳴精舍)가 있어 배낭을 풀고 숨을 돌린다. 뜰 좌편 가에서는 남매탑(男妹塔)이 눈을 맞으며 먼 옛날을 이야기해 준다. 때는 거금(距今) 천 사백여 년 전,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 원년(元年)인데, 당승(唐僧) 상원대사(上原大師)가 이 곳에 와서 움막을 치고 기거(起居)하며 수도(修道)할 때였다. 비가 쏟아지고 뇌성벽력(雷聲霹靂)이 천지(天地)를 요동(搖動)하는 어느 날 밤에, 큰 범 한마리가 움집 앞에 나타나서 아가리를 벌렸다. 대사(大師)는 죽음을 각오(覺悟)하고 눈을 감은 채 염불(念佛)에만 전심(專心)하는데, 범은 가까이 다가오며 신음(呻吟)하는 것이었다. 대사가 눈을 뜨고 목 안을 보니 인골(人骨)이 목에 걸려 있었으므로, 뽑아 주자, 범은 어디론지 사라졌다. 그리고, 여러 날이 지난 뒤 백설(白雪)이 분분(紛紛)하여 사방을 분간(分揀)할 수조차 없는데, 전날의 범이 한 처녀(處女)를 물어다 놓고 가버렸다. 대사는 정성(精誠)을 다하여, 기절(氣絶)한 처녀를 회생(回生)시키니, 바로 경상도(慶尙道) 상주읍(尙州邑)에 사는 김 화공(金化公)의 따님이었다. 집으로 되돌려 보내고자 하였으나, 한겨울이라 적설(積雪)을 헤치고 나갈 길이 없어 이듬해 봄까지 기다렸다가, 그 처자(處子)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전후사(前後事)를 갖추어 말하고 스님은 되돌아오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김 처녀는 대사의 불심(佛心)에 감화(感化)를 받은 바요, 한없이 청정(淸淨)한 도덕(道德)과 온화(溫和)하고 준수(俊秀)한 풍모(風貌)에 연모(戀慕)의 정(情)까지 골수(骨髓)에 박혔는지라, 그대로 떠나 보낼 수 없다 하여 부부(夫婦)의 예(禮)를 갖추어 달라고 애원(哀願)하지 않는가? 김 화공 또한 호환(虎患)에서 딸을 구원(救援)해 준 상원스님이 생명(生命)의 은인(恩人)이므로, 그 음덕(陰德)에 보답할 길이 없음을 안타까와하며, 자꾸 만류(挽留)하는 것이었다. 여러 날과 밤을 의논한 끝에 처녀는 대사와 의남매(義男妹)의 인연(因緣)을 맺어, 함께 계룡산(鷄龍山)으로 돌아와, 김 화공의 정재(淨財)로 청량사(淸凉寺)를 새로 짓고, 암자(庵子)를 따로 마련하여 평생토록 남매(男妹)의 정으로 지내며 불도(佛道)에 힘쓰다가, 함께 서방 정토(西方淨土)로 떠났다. 두 사람이 입적(入寂)한 뒤에 사리탑(舍利塔)으로 세운 것이 이 남매탑(男妹塔)이요, 상주(尙州)에도 또한 이와 똑 같은 탑(塔)이 세워졌다고 한다. 눈은 그칠 줄 모르고, 탑에 얽힌 남매(男妹)의 지순(至純)한 사랑도 끝이 없어, 탑신(塔身)에 손을 얹으니 천 년 뒤에 오히려 뜨거운 열기(熱氣)가 스며드는구나! 얼음장같이 차야만 했던 대덕(大德)의 부동심(不動心)과, 백설(白雪)인 양 순결(純潔)한 처자의 발원력(發願力), 그리고 비록 금수(禽獸)라 할지라도 결초심(結草心)을 잃지 않은 산중 호걸(山中豪傑)의 기연(機緣)이 한데 조화(調和)를 이루어, 지나는 등산객(登山客)의 심금(心琴)을 붙잡으니, 나도 여기 몇일 동안이라도 머무르고 싶다. 하나, 날은 시나브로 어두워지려 하고 땀도 가신지 오래여서, 다시 산허리를 타고 갑사로 내려가는 길에, 눈은 한결같이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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