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그린에듀 제8차 역량강화연수 백사실계곡 계획서
1. 일시 : 2023. 9. 22.(금) 14:00~19:00
2. 만나는 곳 : 경복궁역 1번 출구 앞
3. 준비물 : 간식, 모자(양산), 선크림, 단체조끼, 생수, 연수 내용(파일) 등
4. 연수
가. 강사 : 정기훈(은평구 문화위원회 문화위원, 은평구 평생 교육원 강사)
나. 강의 주제 : 백사실계곡의 생태 및 역사문화적 가치
다. 연수 코스 : 경복궁역 3번 출구 ⇒ 버스로 이동(7022, 7212, 1020번) ⇒ 윤동주문학관 정류장 하차 ⇒ 경찰순직비 ⇒ 창의문 ⇒ 백사실계곡 ⇒ 백석동천⇒ 세검정 ⇒ 홍지문 ⇒ 탕춘대성 ⇒ 옥천암 ⇒ 마애보살좌상
5. 평가회 장소 : 미정
※ 사전 준비팀(박춘근 이수엽 정종윤 등 3명)이 답사(9.4.월) 후에 평가회 장소를 선정, 공지할 예정임.
6. 연수 참가자 : 박춘근 외 36명
사전답사 후 결정 내용
2023 그린에듀 제8차 백사실 계곡 역량강화연수 코스 : 옥천암
⇒ 마애보살좌상 연수⇒ 버스 승차 ⇒ 홍제역 근처 식당《호남 숯불 갈비》(02-391-2224) 이동합니다.
2023년 9월 22일(금) 오전 홍은초등학교 국화향기 봉사를 마치고 점심식사후 넉넉한 시간에 경복궁역 3번출구에서 기다리다 7212번 버스로 먼저 윤동주 문학관에 도착한다.
시간이 되자 센터장님의 인사말씀과 정기훈 강사님의 강의가 시작된다.
1. 1·21사태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民族保衛省) 정찰국 소속의 무장게릴라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하여 서울 세검정고개까지 침투하였던 사건.
언제 : 1968년 01월 21일/어디서 : 서울 세검정고개
누가 /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 31명
어떻게 / 불심검문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 무차별 난사, 시민 살상
왜/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하기 위해
이 사건은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 31명이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고, 한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휴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하여 수도권까지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세검정고개의 자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고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자 검문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하는 한편,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귀가하던 많은 시민들이 살상당하였다.
군경은 즉시 비상경계태세를 확립하고 현장으로 출동하여 29명을 사살하고 1명(김신조)을 생포하였다. 나머지 1명은 북한으로 도주하였다. 이 사건으로 많은 시민들이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그날 밤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총경 최규식(崔圭植)이 무장공비의 총탄에 맞아 순직하였다. 그날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金新朝)는 그동안 김일성의 허위선전에 속아 살아왔음을 깨닫고 한국으로 귀순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북한의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한 향토예비군을 창설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1·21사태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1-1 최규식경무관 (1932.9.9.∼1968.1.21. 당시 종로경찰서장)
-당시 최규식 경무는 자칭 CIC대원이라는 거동 수상자 30여명이 세검정으로부터 지하방면으로 행진한다는 보고를 받고, 타격대 및 병력 출동을 지시하였다. 같은날 오후 10시 35분경 종로구 청운동의 노상에 긴급히 출동하여 일당을 정지시켜 배치경찰관으로 하여금 검문 검색하도록 하였다. CIC대원으로 사칭한 일당은 검문에 불응하고 최규식 총경의 팔을 붙잡으려하고자 이를 뿌리치고 배치 경찰관들에게 이들을 체포할 것을 명령하자 뒤에 따라 오던 일당이 기관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투척하였다.이 와중에 최규식 총경은 복부에 관통상을 입었으나 계속 현지에서 배치 경찰관을 지휘하며 격렬한 총격전을 전개하다 쓰러지며 간첩 1명을 사살하는 등 필사의 저지로 뒤따르던 간첩들을 분산시켜 청와대 기습을 완전 저지하였다.그러나 최규식 총경은 부상을 입고 즉시 경찰병원으로 후송하여 치료하였으나 사망하였다. 그 뒤 1968년 1월 25일 공적을 높이 사 태극무공훈장과 경무관으로의 특진이 추서되었다.
1-2 정종수경사 흉상 및 순직비 (당시 자하문 검문소 근무)
정종수 경사는 1935년 7월 17일 경상북도 상주 출생으로 1960년 경찰에 투신하여 종로경찰서 재직 중이던 1968년 1.21 사태 시 최규식 경무관과 함께 무장공비와 교전 중 순국하였다. 이에 정부는 경사로 추서하고 화랑 무공훈장을 수여하였다.
2. 창의문 (보물 제1881호)
조선 태조 5년인 1395년에 지어진 문으로 한양도성으로 출입하는 사소문(四小門) 중에서 유일하게 현존하는 문이다. 한양도성 사대문과 비교해서 작은 문 4개를 사소문이라고 속칭하는데 조선 후기에 들어 큰 문을 정문(正門), 작은 문을 간문(間門)이라고 정의했다. 창의문은 자하문이라고도 부르는데 북쪽으로 출입하는 작은문으로 조선시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문이다. *출처: 두산백과 두피디아
북소문인 창의문은 자하문이란 애칭으로 널리 불리었다. 숙정문이 항상 폐쇄된 채 구실을 못하였기에 이 문이 그 문의 역할까지 도맡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하기에 사람들은 창의문을 늘상 북문이라 불렀던 것이다. 도성의 북쪽 교외로 빠지거나 가까이는 세검정과 북한산으로 가자면 이 문이 관문이기에 이용도가 적지 않았다. 이 문 근처에는 자하가 많이 끼였는가 세검정 일대를 두고 자문밖이라 하였으니 이는 곧 창의문 밖을 일컫는 말이었다.
*특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색다른 특징을 엿볼 수 있는데 바로 목계를 달아 놓은 것이다. 동소문 문루에 봉황새를 그려 놓은 것이 여타 문과 다른 특색이듯이 창의문 추녀에 나무로 닭을 깎아 매달아 놓은 것 역시 다른 문과 유를 달리하는 모습이다. 그 까닭은 문밖의 지세가 지네와 유사한 상이기에 그 기세를 제압하자면 지네와 상극인 닭의 꼴을 만들어 매달아 놓아야 한다는 속설에 따른 것이다.
창의문에 얽힌 역사적 사실 중에서 인조반정에 관한 것을 빼놓을 수 없다. 인조반정은 광해군 15년 (1623) 이귀 등 서인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이이첨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綾陽君 倧: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이다. 1623년 3월 12일 이귀, 김유, 김자점, 이괄 등은 반정계획을 진행하던 중 계획이 일부 누설되었으나 예정대로 실행에 옮겨 장단의 이서군과 이천의 이중로군은 홍제원에서 김유군과 합류하였다. 반정군은 창의문을 향해 진군하여 문을 깨뜨리고 입성한 뒤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창덕궁을 무난히 점령하였다. 이에 당황한 광해군은 궁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다가 체포되어서 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로 귀양 보내지고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인조이다. 후에 영조는 이 거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창의문의 성문과 문루를 개축하고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현판에 새겨 걸어놓게 하였다. 지금도 그 현판이 문루에 걸려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창의문(자하문)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3.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광해군 15) 서인 세력이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를 조선 제16대 왕으로 등극시킨 사건을 말한다. 인조반정으로 정국을 주도하게 된 서인 세력은 이후 반정의 주도세력으로 왕권을 제약하였고, 광해군 때의 중립외교정책을 패륜으로 비판하면서 친명배금정책을 추진하였다.
조선의 역사상 성공한 반정은 연산군을 폐위시킨 중종반정과,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반정이 있다. 광해군은 붕당 간의 대립이 심화된 상태에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왕권의 기반이 매우 취약했다. 이에 광해군은 1613년 왕위를 위협하던 영창대군을 제거하는 것은 물론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면서 왕권의 위협 요소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특히 광해군은 중립외교로 후금과 평화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는 명분을 중시하는 사림세력의 불만을 일으키게 된다. 이에 계축옥사(1613년 대북파가 영창대군 및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옥사) 당시 대부분 조정에서 쫓겨났던 서인들은 사림세력의 이러한 불만을 이용해 반정을 일으키게 되었다.
반정군이 궁내로 진입하자 광해군은 달아나 의관이던 안국신의 집에 숨었으나 곧 붙잡혔고, 군(君)으로 강등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여기에 반정군은 고관대작 40여 명을 참수하고, 200여 명을 귀양보냈다. 그리고 이후 경운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의 존호를 회복시켜준 뒤에 그 권위를 빌어서 인조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후 서인세력은 반정의 주역으로서 정국을 주도하며 왕권을 제약하였고, 광해군 때의 중립외교정책을 패륜으로 비판하면서 친명배금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후금을 자극하였고, 결국 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조반정
4. 백사실 계곡 (白沙室溪谷) ○ 위치 : 서울 종로구 부암동 115/ 명승 제 36호
*해설① - 창의문을 나서 홍예 위에 누조를 보면 ‘壽福’이라는 글이 각각 한 자씩 새겨져 있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 올때 머리를 들고 이 두 글을 읽고 마음에 새기며 성문을 들러오라는 의미가 아닐까? 그러나 창의문은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산세가 흡사 지네를 닮아 지네의 독기가 문을 넘어 궁궐에 이른다고 하였다. 창의문 천정에는 지네의 천적인 닭을 닮은 봉황을 그렸고, 평시에 문을 닫아 두었다. 다만 강무에 참여하는 군사와 왕과 왕실의 종친들이 사냥을 하러 나갈 때 은밀한 비밀통로로 사용되었다. 특히 광해군 14년에 홍제원에 집결한 반정군이 세검정과 창의문을 통과하여 인조반정을 일으켰을 때 열렸다. 지금의 창의문은 언제나 열려있다. 밖을 나서면 또 하나의 홍예터널이 가로 막는데, 북악산을 오가는 도로가 있기 때문이다. 이 터널을 지나면 조선부터 근대까지 한옥과 고택, 별서가 많이 자리하고 있던 마을인 부암동이다. 부암동은 부침바위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어진 지명으로, 이 바위에 자기 나이만큼 돌을 문지르다 손을 떼는 순간, 바위에 돌이 붙으면 아들을 얻는다는 전설이 머문 곳이다.
*해설 ② - 서울에서 보기 드물게 문화사적(백석동천, 사적)과 자연환경이 우수한 자연생태지역으로 도롱뇽, 개구리, 버들치, 가재 등 다양한 생물체들이 서식하고 있다. 특히, 1급수 지표종인 ''도롱뇽''은 서울특별시자연환경보전조례에 의한 서울시 보호야생동물로서 백사실계곡에 집단으로 서식하고 있어 그 보존가지가 매우 높은 지역이다. 아는 사람만 안다는 서울의 청정 계곡으로 도롱뇽이 산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백사(白沙) 이항복의 별장터가 있어 붙은 이름이라고 전해지나 이는 잘못 와전된 말이다. 깊은 숲을 따라 이어지는 오솔길과 걸음을 막아서는 크고 작은 계곡의 정취는 이곳이 과연 서울인가를 의심하게 한다. 버들치, 도롱뇽 등의 서식지인 만큼 계곡에 발을 담그지는 말고 그저 풍광만 탐할 것을 권한다. 카페 산모퉁이와 군부대를 지나면 계곡 입구가 나온다. *전지현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기사입력 2016.06.20 13:34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 전문위원
*해설③ - 그동안 백석동천 소유자가 분명하지 않아 다양한 가설이 있었지만 대대로 서울에 살며 벼슬을 한 경화세족 출신 애사 홍우길이 19세기에 백석동천 일대 백석실(白石室)을 보유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1786∼1856) '완당전집'에는 그의 별서에 백석정 옛 터가 있었다고 기록했으며, 조면호(1803∼1887)의 시에 백석실은 당시 홍우길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달빛이 머물다 가는 계곡 ‘백석동천(白石洞天)’
*해설④ - 백석동천은 달리 ‘백사실(白沙室)계곡’이라고도 하며 이러한 별칭 때문에 계곡에 남아있는 별서(別墅) 터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유적지로 잘못 알져지기도 했지만 이항복과는 무관하다고 한다. 백사실의 원래 이름은 백석실(白石室)이었으며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허진인(許眞人)이 개척하였고 한때는 추사 김정희의 별서였다가 1830년대에 중건되었다고 하는데, 박규수의 <환재집(瓛齋集)>에는 백석정이 허진인이 독서하던 곳이라 하였고 김정희의 <완당전집(阮堂全集)>에는 “선인(仙人)이 살던 백석정을 예전에 사들였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도 안채, 사랑채 주춧돌과 연못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추사가 터만 남아 있던 백석정이라는 정자의 부지를 사들인 뒤 새로 건립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출처] 백석동천,능금마을|작성자 이래춘
▲ 백석동천 각자 © 정진해
백악산은 3개의 골짜기를 소유하고 있는 산이다. 서쪽 사면으로 흘러내려 경복궁의 오른쪽을 휘감아 흐르는 백운동천(白雲洞天), 백악의 동쪽 사면을 흘러내려 경복궁의 왼쪽을 휘감아 흐르는 삼청동천(三淸洞天), 도선 밖인 백악의 북서쪽을 흐르는 백석동천(白石洞天)이 그것이다. 백석동천과 삼청동천은 도성 안의 청계천으로 흘러들고 백석동천은 도성 밖 홍제천으로 흘러든다.
백석동천으로 가는 길은 백악산과 인왕산을 조망권에 둔다. 높은 산을 타고 이어지는 한양도성을 보고 있으면 짜릿한 전율이 온 몸에 퍼진다. 발을 닿기만 하여도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질 것 만 같은 느낌을 받는 경사지에 어떤 기술과 정신으로 큰 돌을 깎아 운반하고 정교하게 쌓을 수 있을까 생각을 갖게 하는 전망대이기도 하다, 한참 걷다보면 백사실계곡과 팔각정의 이정표를 만나는데, 이곳에는 손바닥만한 작은 텃밭에 상추가 자라고 살구가 익고 장미꽃이 피는 또 다른 길을 따라 내려가다보면 어느새 ‘白石洞天(백석동천)’이라는 각자바위를 만나게 된다. 소나무 참나무가 우거지고 계곡이면서 물소리는 점점 숲으로 숨어버리는 듯한 음산한 느낌을 받는다. 부암동 백석동천은 북악산의 북사면에 위치하고 있는 백사실 계곡을 일컫는다.
▲ 월암 각자 © 정진해
‘백석(白石)’은 ‘흰바위’을 말한다. 흰바위는 낮에 보면 흰바위가 아니다. 흰바위는 달빛에 비쳐져야 바위표면이 달빛 색으로 덮는다. 이곳의 흰바위는 백악(북악산)을 뜻하고, ‘동천(洞天)’은 ‘계곡에 하늘이 있다’고 하였다. 달이 뜬 날에는 달빛이 계곡의 넓은 바위를 흰빛으로 물들이고, 계곡의 수많은 나무는 검게 보이니 보이는 것이 없고 오직 하늘에 뜬 달과 별만 보인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 그러나 달밤의 반대는 낮이다. 낮은 태양빛이 산천을 비쳐 갖가지 색을 두루 비춰 원래의 색과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때의 ‘동천’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을 말한다. 백석동천은 달밤을 이야기 한다. 달밝은 날이면 이 계곡에서 달빛을 감상하며 시 한 수를 읊을 수 있는 장소였던 곳이다. 가까운 곳에 ’월암(月巖)‘이라 새긴 각자가 있다. ’달빛이 머무는 바위‘이다. 두 곳의 각자는 백사실계곡을 달빛에 의해 아름다움을 표출한 모습을 사실적으로 직시한 것이다. 이 각자를 월암 이광려 글씨로 추정하고 있으나 아직 뒷받침할 만한 구체적 증거는 없다.
▲ 별서터와 육모정 초석 © 정진해
소나무가 있으면 어김없이 참나무가 그 사이를 메워준다. 옛부터 참나무는 굳은 신념과 인내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소나무가 선비라고 하면 참나무는 주인이다. 이곳에는 굵기만 보아도 몇 백년을 뛰어넘는 출세와 수호의 상징인 느티나무가 곳곳에 자리를 잡았다. 소나무와 참나무 느티나무가 백사실 계곡을 덮었다.
계곡의 물은 소리없이 모래에 스며들었다 다시 바위틈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자그마한 물줄기를 가진 계곡이다. 갈수기 되면 졸졸 흘러내린 물이지만 장마가 되면 물은 삽시간에 넘쳐나는 계곡이다. 이곳에는 언제나 물과 함께 서식하고 있는 도룡뇽이 서식하고 있는 곳이다. 쉽게 볼 수 없는 도룡뇽은 이곳에 서식하면서 낮에는 숨어살고 밤이면 활동하며 먹이를 찾는다.
계단은 별서로 오르는 계단과 연못으로 오르는 계단, 연못에서 사랑채로 올르는 계단이 있다. 별서로 오른 계단을 오르면 장대석으로 2단의 기단을 올리고 그 위에 마름모 형태의 장초석과 단초석을 놓은 사랑채와 안채 건물로 보이는 터, 건물 주위로 둘러진 돌담의 흔적을 일컬어 별서터라고 하는 데, 누구에 의해 지은 것인가에 대한 정확히 확인 된 것은 없다. 조선 말, 심암 조두순과 미산 한장석은 백사실을 ’白石室(백석실)‘로 표기 하였다. 조두순의 <심암유고>에 실린 시에 “백석정의 주인을 찾아서(尋白石主人)”와 한장석은 <미산문집>에 “獨遊白石室, 三宿而還 홀로 백석실에 놀면서 사흘 밤을 자고 왔다.”라고 하여 백사실의 명칭과 관련한 의혹이 풀린다.
▲ 계단 © 정진해
추정되어 오던 백사 이항복의 별서라고 했던 이곳은 어느 시대 사람인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순조 20년(1820) 박규수의 글중 주석에서 밝힌 허진인이란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고 하였다. <동명연혁고>에 의하면 백석실 별서의 최후 건물이 1830년대에 지어졌다고 하는데 이것은 1830년 이후에 백석정이 재건되었음을 알리는 단서가 된다. 창건 후 중간에 추사 김정희가 매입하였다는 것이 그의 시에 나타나 있다.
區區文字有精靈(구구문자유정령) 하찮은 문자에도 정령이 배었으니
舊買仙人白石亭(구매선인백석정) 선인 살던 백석정을 예전에 사들였네
라는 대목과 주석(완당전집 권9) ’與今軒共拈鍾竟陵韻十首‘에 “나의 북서를 말한다. 백석정 옛터가 있다(謂余北墅 有古白石亭舊址)고 한 대목이 증명한다.
이곳의 별서는 1830년대에 지었는데, 안채는 사량(四樑)이었으며, 사랑채는 ’ㄱ’자 5량으로 기둥이 굵고 누마루가 있었다. 관리가 되지 않은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1970년대에 무너졌다. 연못가에 있는 정자인 육모정은 1950년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없어졌다고 알려지고 있다. 육모정의 6개의 초석 중 연못 내에 세워진 초석은 6각의 장초석을, 바깥쪽의 4개의 초석 단초석을 놓아 수평을 이루고 있으며, 원래 위치에서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연못은 사각형에 가깝고 많은 토사가 쌓여 연못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는 상태이다. 아래의 현통사 너럭바위 있는 곳까지가 백석동천이다. 능금마을을 지나 흘러내려온 물줄기는 세금정까지 이어지다 다시 탕춘대성 수문을 지나 홍제천으로 내려가 한강(漢江)으로, 다시 서해바다로 종점이 없는 여행을 떠난다.
5. 세검정 (洗劍亭)
세검정의 역사 - 세검정은 조선 숙종(재위 1674∼1720)때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웠다고도 하며, 연산군(재위 1494∼1506)의 유흥을 위해 지은 정자라고도 전한다. 세검정이란 이름은 광해군 15년(1623) 인조반정 때 이곳에서 김류, 이귀 등이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반정에 성공한 후 이곳에서 칼을 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세검은 혼란한 세상을 평정하고 칼을 씻어 칼집에 넣고 태평성대를 맞이한다는 뜻이 있다.
영조 24년(1748)에 고쳐 지었으나 1941년 화재로 조지서와 함께 소실된 것을 겸재 정선의 세검정도를 기초해 1977년에 복원했다. 세검정 인근에는 국가 표준 종이와 지폐용 저화지를 만드는 조지서가 있었고 이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한지마을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세검정초등학교 운동장 한켠에는 장의사(莊義寺) 당간지주(보물 235호)가 서있다. 장의사는 황산벌 싸움에서 전사한 화랑 장춘랑과 파벌구의 넋을 기리기 위해 신라 무열왕 6년(659)에 지어졌는데 연산군 대(燕山君代)에 이 절을 작파하고 놀이터로 만들어 '봄(春)을 질탕(蕩)하게 즐긴다' 뜻으로 탕춘대(蕩春臺)라 하였다. 연산군이 타락했던 시절에 이 일대에 있던 고찰 장의사(藏義寺)를 철거하고 정자 탕춘정(蕩春亭)을 지어 연회를 즐겼던 데에서 비롯했다. 1754년(영조 30년)에 영조는 탕춘대 이름을 '연융대(鍊戎臺)'로 바꾸었는데, 성 이름은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당간지주란 절 입구에 깃발을 거는 기둥인 당간을 받치는 돌기둥을 말한다. 운동장 한쪽에 높이 3.63m의 거대한 석주 두 개가 단단하게 박혀 있다. 고려시대 때에는 승려가 1,000명이 넘을 만큼 규모가 컸다 한다. 이 당간지주(幢竿支柱)는 기단부(基壇部)가 모두 훼손되어 원형을 추정할 수 없고, 현재의 모습은 두 개의 지주를 마주 보게 하여 배치하였다.
전체적으로 높이에 비하여 중후한 편이며, 별다른 장식이 가해지지 않은 매우 소박한 모습이다.
세검정은 더 오래 전부터 세초의 현장이었다.
세초(洗草)는 원고지를 씻는다는 뜻으로, 조선왕조실록 편찬에 사용되었던 사초(史草)와 원고들의 누설을 막기 위한 작업을 말한다. 간혹 불태우기도 했으나 보통은 종이를 물에 씻어 글자는 지워버리고 종이는 재활용했다. 세검정 인근에 종이 만드는 일을 담당하던 국가기관인 조지서(造紙署)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종이를 다시 쓸 수 있게 재생산했다. [출처] 서울 단풍여행 백사실 계곡,백석동천,능금마을|작성자 이래춘
*조지서[ 造紙署 ]
조선 시대 각종 종이의 제조를 담당한 관청. 관원은 제조(提調) 2인•사지(司紙) 1인•별제(別提) 4인이 있었고, 이속(吏屬)은 서원(書員) 2인•고직(庫直) 1인•사령(使令) 2인이 있었음. 태종 15년(1415)에 설치한 조지소(造紙所)를 세조 12년(1466)에 조지서(造紙署)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고종 19년(1882)에 혁파되었음.[네이버 지식백과]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6. 홍제천(弘濟川)
삼각산(북한산) 서쪽 기슭과 북악산 북서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홍지동과 홍은동을 지나 백련산 동쪽을 감싸 돌면서 남가좌동에 이르고 불광천을 합류하여 난지도를 끼고 한강에 유입되는 한강 제1지류이다. 홍제천 길이는 13.92㎞이고 평균 하폭은 50m이다. 홍제천 위로 내부순환로가 가설되어 한강 이북지역의 교통 소통에 일조하고 있다. 모래내,사천,홍제원내,홍제원천,성산천,세검천,홍은천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 이 하천 연안에 중국의 사신이나 관리가 묵어 가던 홍제원(弘濟院)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으며, 같은 유래로 홍제원천(弘濟院川)이라고도 한다. *[출처] 서울 단풍여행 백사실 계곡,백석동천,능금마을|작성자 이래춘
7. 홍지문 및 탕춘대성 [ 弘智門 및 蕩春大城 ]
위치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 산 4-4
유형 / 조선시대 문루와 성곽. 1976년 6월 25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
1715년(숙종 41)에 서울의 도성과 북한산성의 방어시설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었다.
탕춘대성은 서울의 북서쪽 방어를 위하여 세운 성곽으로, 서성(西城)이라고도 한다. 인왕산 정상의 서울 성곽에서부터 수리봉까지 이어진 4㎞ 정도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은 북한산성을 축성하였으나 북한산성이 높아서 군량 운반이 어렵자 세검정 부근에 있던 탕춘대(蕩春臺) 일대에 군사를 배치하고 군량을 저장하기 위하여 이 성을 축성하기로 했다. 원래 세검정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한산주(漢山州)로서 군사상 중요한 지역이었다.
홍지문(弘智門)은 탕춘대성의 출입문으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한다. 중앙에 홍예문이 있는 축대 위에 단층 문루를 세웠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 건물이다. 성문에 이어 성벽을 연결하여 만든 오간수문(五間水門)은 도성의 물길을 고려하여 높이 5.23m의 홍예문을 5개 내어 홍제천의 물을 흐르게 한 시설로, 조선시대 치수정책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1921년에는 문루가 내려앉고 오간수문도 장마로 떠내려가 황폐해졌다. 그 뒤 1977년에 탕춘대성의 성벽을 보수하고 오간수문, 홍지문을 복원하였다. 1976년 6월 25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종로구에서 관리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홍지문 및 탕춘대성 [弘智門 및 蕩春大城] (두산백과 두피디아),
*홍지문오간수교[ 弘智門五間水橋 ]
종로구 홍지동 홍제천 위에 있는 다리이다. 숙종 45년(1719) 탕춘대성(蕩春臺城)을 축조할 때 홍지문을 만들고 세검정에서 흘러 내려오는 하천을 건너기 위해 흥인문(興仁門)(동대문) 옆에 있던 오간수문과 비슷한 구조로 다섯 개의 수문을 만들었다. 창의문을 지나 녹반현으로 갈 때 이 다리를 건너 서쪽으로 가면 의주로와 만날 수 있었다. 일명 오간수다리라고도 부른다. 이 수문은 1921년 홍수 때 유실되었다가 1977년 홍지문을 복원하면서 함께 복원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울지명사전, 2009. 2. 13., 서울역사편찬원)
8.옥천암[ 玉泉庵 ]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창건연대 및 창건자는 미상이며, 1868년(고종 5)에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명으로 정관법사(淨觀法師)가 관음전(觀音殿)을 건립하여 천일기도를 올렸다. 서울에서 이름난 명소였던 옥천암은 일찍부터 ‘불암(佛巖)’으로 알려져 있던 고찰이며,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때 이곳에서 기도를 올렸다고 전하기도 한다. 1927년에는 주지 이성우(李成祐)가 칠성각(七星閣)과 관음전을 건립하였으며, 1932년에는 대방 6칸과 요사채 3칸을, 1942년에는 주지 동봉(東峰)이 관음전을 중수하고 보타전(寶陀殿)을 중건하였다.
9.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 玉泉庵 磨崖菩薩坐像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지문길 1-38. 홍은동에 있는 고려시대 마애불.
2014년 3월 11일 보물로 지정
고려시대 유물 / 불교조각 / 석조 / 보살상, 크기 / 높이 약 5m
1973년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14년 3월 11일 보물로 승격 지정되었다. 관음보살좌상(觀音菩薩坐像)으로 석불의 높이는 5m 정도이다. 하얀 불상이 새겨져 있는 바위에는 정면 1칸, 측면 2칸의 보호각(保護閣)인 보도각(普渡閣)을 지어 보존하고 있다. 불상은 바위의 평평한 면에 새겨졌으며 호분(胡粉)과 금분(金粉) 등을 칠하였고 머리에는 꽃무늬가 장식된 삼면관을 썼다. 얼굴은 둥글고 눈이 가늘며 입이 작아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나타낸다.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서울에 도읍을 정할 때도 이 마애불에 기원을 했다고 한다. 또 조선 말기 고종의 어머니인 흥선대원군 부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閔氏)도 이 석불 앞에서 아들의 복을 빌었다고 전해온다. 부처에 흰칠을 했으므로 고종 때부터 백불이라고 불렀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울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이 마애불에는 1편의 영적기(靈蹟記)가 전해지고 있다. 1807년(순조 7)에 고양군 신도면에 살았던 윤덕삼(尹德三)이라는 노총각은 나무 장사를 하여 노부모를 봉양하였다. 그는 홍제동에서 자하문을 넘어 나무를 팔고 돌아올 때마다 이 석불 앞에서 수십 번씩 절하면서 아내를 얻어 아이를 낳고 부자가 되어 나무 장사를 면하게 해 달라고 기원하였다. 100일이 넘은 어느 날, 꿈에 한 노부인이 나타나서 “내일 새벽 자하문에 나가 문이 열리거든 첫 번째 성 밖으로 나오는 여인을 집으로 데리고 오면 소원을 이루리라.” 하였다. 다음날 새벽에 자하문이 열릴 때 윤 도령을 찾아간다는 처녀를 만났는데, 그녀 역시 전날 밤에 윤 도령과 백년해로하라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석불에 예(禮)를 올린 뒤 집으로 돌아와서 낭자가 가지고 온 패물을 팔아 전답과 산을 사고 일대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어 자손을 낳고 단란하게 살았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옥천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 마애보살상과 관련하여 여러 기록들이 전한다. 우선 15세기 후반에 활약한 대학자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처음으로 이 마애불상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즉 “장의사 앞 시내… 물줄기를 따라 몇 리를 내려가면 불암(佛巖)이 있는데, 바위에 불상을 새겼다”라는 매우 구체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 15세 후반 경에는 이미 마애보살상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 후반부터 옥천암이라는 명칭이 등장했고, 19세기 이후로는 ‘해수관음(海水觀音)’, ‘백의관음(白衣觀音)’ 또는 ‘백불(白佛)’로 불리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868년(고종 5)에는 명성황후가 해수관음 곁에 관음전을 지었다는 기록과 함께 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의 모친인 여흥부대부인 민씨가 옥천암에서 기도를 하며 호분을 발랐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의의)
이 마애보살좌상에 보이는 삼면 절첩식 보관과 뿔 모양의 관대, 타원형의 보관 장식, 천의식 착의법 등은 성북구 안암동에 위치한 보타사 마애좌상과 형식이나 양식적인 면에서 거의 흡사한 특징을 보여준다. 특히 이 보살상의 천의식 착의 형식은 고려 말 조선 초에 조성된 보살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양식적 특징이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이 마애보살상의 존재가 확인되기 때문에 조선 전기 이전에 조성된 마애보살상임이 분명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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