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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국내여행

안동 문화답사(민속박물관)(2023.09.21)

by 도화유수 2023. 9. 22.

봉정사 극락전
이천동 마애여래입상(제비원 석불)
월릉교에서 만난 친구
법흥사지 칠층 전탑

 

 

제목 9월 문화답사
[Web발신]
[국립민속박물관회] 안녕하세요. 답사 2호차에 배정되었습니다. 9월 21일(목) 안동 답사는 오전7시30분 정시에 국립민속박물관 정문에서 출발하오니 늦지마십시오.

(출발시간 엄수) 답사 참가자는 간편한복장, 운동화착용, 물, 필기도구준비 바랍니다. (중식제공)

 *답사 차량의 좌석은 탑승 선착순이고, 미리 동행자의 자리를 맡아 놓을 수 없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 국립민속박물관회 -

□ 봉정사(鳳停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2018년 6월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신라시대인 서기 682년(신문왕 2) 의상(義湘)이 창건한 절로 알려졌으나 1972년 극락전에서 상량문이 발견됨으로써 672년(문무왕 12) 능인(能仁) 대사가 창건했다는 것으로 밝혀졌다.

천등굴에서 수학하던 능인 대사가 도력으로 종이로 봉(鳳)을 만들어 날렸다. 이 봉이 앉은 곳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창건 후 능인은 절에다 화엄강당(華嚴講堂)을 짓고 제자들에게 법을 전했다(傳法)고한다.

일설에는 능인이 화엄기도를 드리기 위해 산에 오르니 선녀가 나타나 횃불을 밝혔고 청마(靑馬)가 앞길을 인도해 지금의 대웅전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산 이름을 천등산이라 하고 청마가 앉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절 이름을 봉정사라 했다도 한다.

창건 이후의 뚜렷한 역사는 전하지 않으나 참선도량(參禪道場)으로 이름을 떨쳤을 때는 부속암자가 9개나 있었다고 한다.

6·25전쟁 때 인민군이 머무르면서 절에 있던 경전과 사지(寺誌) 등을 모두 불태워 역사를 자세히 알 수 없다.

안동의 읍지인 영가지(永嘉志)에 ‘부(府)의 서쪽 30 리에 천등산이 있다’고 했다. 1566년(명종 21) 퇴계 이황(李滉)이 시를 지어 절의 동쪽에 있는 낙수대(落水臺)에 붙였다는 기록이 남아 조선시대에도 계속 존속했다는 것을 해 알 수 있다.

2000년 2월 대웅전 지붕 보수공사 때 발견된 묵서명을 통해 조선시대 초에 팔만대장경을 보유하고 500여 결(結)의 논밭을 지녔으며 당우도 전체 75칸이나 됐던 대찰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1999년 4월 21일에 봉정사를 방문하기도 했다.

현재 봉정사에는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알려진 국보 제15호 봉정사 극락전을 비롯 보물 제55호인 봉정사 대웅전, 보물 제448호인 봉정사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봉정사 고금당(古今堂) 등의 지정문화재와 무량해회(無量海會: 僧房)·만세루(萬歲樓)·우화루(雨花樓)·요사채 등 21동의 건물이 남았다.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2호로 지정된 총 높이 3.35m의 삼층석탑, 경판고(經板庫)에 대장경 판목이 보관됐다. 부속암자로는 퇴락한 영산암(靈山庵)과 오른쪽 골짜기 부근의 지조암(智照庵)이 있다.

△ 봉정사 동종

조선 순조 13년(1813)에 만들어진 것으로 크기는 높이 67㎝, 음통 높이 22㎝, 종입구 지름 55㎝이다. 종은 전체적으로 어깨 부분은 완만한 곡선을 이루다가 중간 부분부터 종 입구까지는 거의 직선으로 처리되었다.

종 머리에는 종을 매다는 용뉴와 음통이 있는데, 용뉴는 용의 머리를 조각하였으나 약식화되었고 조선시대 종에는 생략된 소리의 울림을 좋게 하는 음통은 모양만 갖추었을 뿐 구멍은 막혀 있다.

종은 전체적으로 가로로 선을 돌려 세부분으로 나뉘었다. 가장 윗부분에는 서있는 모습의 보살상을 2구 조각하여 대칭적으로 배치하고 그 사이에 네모난 유곽이 자리하고 있다. 유곽안에는 9개의 유두가 있다. 종의 가운데 부분에는 범자(梵字)가 새겨진 동그란 원을 4개 배치하였고 그 나머지 여백에는 종의 내력을 적은 글이 새겨져 있다.

이 종은 비록 약식화되고 형식화되었으나 신라시대, 고려시대의 양식을 갖추고 있어 19세기에 만들어진 종으로서 신라, 고려 시대의 종 모습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된다.

△대웅전

△극락전

△고금당

△화엄강당

△만세루

△영산암

 

 

명옥대

□ 제비원석불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安東 泥川洞 磨崖如來立像)은 경상북도 안동시 이천동에 있는 고려 시대 마애불 입상이다. 흔히 '제비원 석불', '제비원 미륵불'이라고 부른다.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 보물 제115호로 지정됐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15호 안동이천동석불상(安東泥川洞石佛像)으로 지정됐다가 2010년 8월 25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됐다.

자연암벽에 신체를 선으로 새기고 머리는 따로 올려놓은 전체 높이 12.38m의 거구의 불상이다. 이러한 형식의 불상은 고려시대에 많이 만들어졌다.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보물 제93호)도 거의 같은 수법을 보여준다.

머리의 뒷부분은 거의 파손됐으나 앞부분은 온전하게 남았다.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이 솟았고 얼굴에 자비로운 미소가 흐르기 때문에 거구의 불상임에도 전체적인 형태는 자연스럽다. 머리와 얼굴 특히 입에는 주홍색이 남아 원래는 채색이 분명하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며 몇 개 안되는 옷주름은 매우 도식적(圖式的)으로 표현한다. 양 손은 검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 왼손을 가슴에 대고 오른손을 배에 대는 모습이다.

이 작품은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지방화된 거구의 불상 가운데 하나로 당시 불상 양식을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 안동민속촌(安東民俗村)

안동민속경관지라고도 한다. 안동댐 건설로 물에 잠기는 수몰지역의 민속문화재를 한 곳에 모아 보존하기 위해 조성됐다. 1976년 안동댐의 보조 댐을 마주보는 언덕 기슭 약 3만 3000㎡의 지역에 조선시대 건축 양식을 그대로 보존하는 민가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유산들을 배치해 관광지로 공개했다.

가옥으로는 이원모 ㅁ자 기와집, 박명실 초가겹집, 이춘백 초가겹집, 박분섭 초가까치구멍집, 이필구 초가토담집(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4호)을 비롯 초가도토마리집(경상북도 민속자료 제6호)·돌담집·통나무집 등을 보존했다.

낙동강의 진상품인 은어를 보관하기 위해 조선 영조대에 만든 안동석빙고(보물 제305호), 조선 숙종대 건물인 선성현객사(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9호), '月映臺(월영대)'란 해서체 글씨가 새겨진 직사각형의 바위인 월영대(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2호) 등을 비롯 연자방아·물레방아 등이 보존됐다. 입구에는 장승과 안동 출신의 충절 시인 이육사 시비가 세워졌다.

낙동강과 안동댐이 바라보이는 전망과 함께 민속촌 주위에는 8만 3000여 그루의 나무를 심어 용성공원을 조성해 관광지로 면모를 갖췄다. 우리의 전통문화중 조선시대의 양반문화가 깊이 뿌리 박힌 안동지방에 안동호와 더불어 새롭게 개발·정비된 안동민속촌은 전통문화 관광도시인 안동에 활기를 주고 있다.

□ 임청각(www.imcheonggak.com)

종손인 석주 이석주 선생은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의병기지를 세워 독립운동에 첫 발을 내디뎠고 서양의 정치 과학 문명을 받아들여 구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나라가 망하자 석주는 조상의 위패를 없애고 노비를 해산시켜 근대사회로 길을 열고 독립전쟁만이 나라를 되찾을 길임을 밝히고 많은 재산을 처분하여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세우려고 나섰다.

임청각 사람들이 펼친 독립운동은 빼어나고 장엄하다. 경학사를 조직하여 동포사회의 안정을 이루면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했다. 만주에서 자금이 떨어져 하루를 견디기 힘들자 석주는 임청각을 팔기로 했다. 몇차례 매도계약서를 작성했으나 여의치 않자 문중에서 일부 자금을 마련해 줬다. 그러나 그마저도 화로위에 눈 녹듯 사라졌다.

석주는 군사통일회의, 대한통의부, 정의부를 지도하면서 동포사회를 이끌었고 또 보수와 진보로 나뉘자 통합운동에 나서 그 구심점이 되었다. 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임시정부 2차 개헌 때, 국가 수반)을 맡아 독립운동계 분파 통합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임청각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살림집 중 가장 오래된 집입니다.

조선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원(李原 : 1368 ∼1429)의 여섯째 아들인 영산현감 이증(李增)이 이곳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여기에 자리잡음으로써 입향조가 되었고 이증의 셋째 아들로 중종 때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李洺)이 건축했다.

임청각은 영남산 기슭의 비탈진 경사면을 이용하여 계단식으로 기단을 쌓아 지어진 전통한옥이며, 99칸 기와집으로 알려진 이 집은 안채, 중채, 사랑채, 사당, 행랑채, 별채는 물론 아담한 별당(군자정)과 정원까지 조성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이다.

△ 임청각 어원

"임청"은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구절 중 登東皐以舒嘯(등동고이서소), 臨淸流而賦詩(임청류이부시)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노라.’라는 싯구에서 ‘임청(臨淸)’을 따왔고 계단식 집으로 층이 있기에 당(堂)이 아닌 각(閣)이라고 한다.

임청각 현판은 퇴계 이황(李滉) 선생의 글씨로 전해온다.

 

△ 임청각의 역사

▹건립

1519년 조선중종 때(조선중기) 이명이 임청각 건립

▹계승

18세기 11대 종손 허주 이종악(1726년~1773년)이 집주인이 됨

▹독립운동의 산실

석주 이상룡 선생을 비롯 선생의 아들, 손자 등 독립운동가 11명을 배출하는 등 3대에 걸쳐 독립운동을 한 독립운동 산실입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1월 많은 재산을 처분하여 마련한 독립운동자금을 들고 만주 망명길에 올라 독립운동기지인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웠으며 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을 맡아 독립운동계 분파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망명 직전에는 "공자와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며 독립운동에 매진할 것을 다짐했다.

선생은 망명 직전 임청각에 있는 사당으로 올라가 신주와 조상 위패를 땅에 묻고 나라가 독립되기 전에는 절대 귀국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만주 망명길에 오른 2년 뒤인 1913년에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자금이 떨어져 하루를 견디기 힘들자 아들 이준형에게 “국내로 들어가 임청각을 처분해서라도 군자금을 마련하라”고 했다. 그 후 국내로 들어온 아들 이준형이 몇 차례 매도계약서를 작성했으나 여의치 않자 문중에서 독립운동 자금 500원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강제 철거

1942년 일제가 놓은 철길로 반토막이 난다.

 

□ 법흥사지 칠층전탑(法興寺址 七層塼塔)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은 경상북도 안동시에 위치한 탑으로, 대한민국에서 현존하는 전탑 중 가장 크다. 1962년 국보 제16호로 지정됐다.

통일신라 시대 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17m, 너비 7.75m에 이른다. 단층 화강암 기단 위에 7층 탑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륜부는 금속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원래 신라 때 창건된 법흥사의 탑이라고 전해지나 절은 오랜 세월이 지나며 어느 순간 흔적이 사라졌고 지금은 탑만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본래 사찰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고성 이씨 탑동파 종택이 들어섰다.

대체로 한국에는 석탑이 많고 그 외에 전탑 모양만 흉내낸 모전석탑이 있지 중국에 흔한 전탑은 많지 않은 편인데, 이 탑은 한국의 몇 안 되는 전탑이다. 많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각 층 지붕에 기와가 얹어진 부분이 있다. 이를 통해 목탑 양식을 모방하여 만들어졌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기단부는 시멘트로 되어 있는데, 미륵사지 석탑처럼 일제강점기때 유지·수리한다는 명목하에 발라 놓았고, 기단부 부조들도 엉망으로 배치해놨다. 이로 인해 원형에 심각한 손상이 와서 본래 모습을 추정하기가 어렵다.

학술적 가치도 높지만 다른 쪽으로도 유명한데,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일명 '안동의 사탑'(斜塔)으로도 불린다. 일제강점기에 개통한 중앙선 철길이 옆으로 지나갔기 때문이다. 1,000년도 넘은 고탑 바로 옆으로 기차가 약 80년간[1] 계속 지나다녔고 그 진동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한쪽으로 기울게 된 것. 전탑은 벽돌을 쌓은 구조상, 목탑이나 석탑보다 열차가 지날 때마다 반복되는 진동에 더욱 취약하다고 여겨지기에 큰 문제다.

탑의 보전을 위해 옆으로 난 중앙선 철길을 이설해야 하는데 쉬운 일은 아니다보니 광복 후에도 70년 가까이 바로 옆으로 기차가 지나다녔다.

꼭 탑 때문이 아니라도 중앙선이 안동 시내를 가로지르면서 남북으로 양분시키는 문제 때문에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중앙선 이설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많은 진통과 티스푼 공사 끝에 2020년 12월 17일 마침내 중앙선 안동 시내구간 철길이 안동역과 함께 외곽으로 이전되며 열차의 진동을 겪지 않게 되고 현재 도로에서도 잘 보인다.

이와 함께 인근에 위치한 석주 이상룡의 생가인 고택 임청각의 잔여 부분 역시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참고>

안동의 낙동강변에는 신라시대 전탑 3기가 남았다.

1. 법흥사 칠층전탑

2. 운흥동 오층전탑

3. 조탑리 오층전탑

 

안동 전통문화 현장답사 기행(20230921)